[권도균의 그림 이야기] 조각조각 1-1 '전뢰진 작가'
[권도균의 그림 이야기] 조각조각 1-1 '전뢰진 작가'
  • 권도균
  • 승인 2018.05.27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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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아트스페이스H] '인간의 순수한 마음을 돌에 조각하는 조각 9단 전뢰진 작가'

전뢰진 조각가를 모임에서 만난 건 여러 번이지만, 술자리를 함께 한건 딱 세 번 뿐이다. 첫 술자리는 몇 년 전 여름,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뒤편 막걸리 파는 전집이었고, 두 번째는 인사동 한정식집, 세 번째는 봉천동 작업실 근처 작가의 단골 한식집이었다.

2016년 11월 2일 마포구 서교동 인사갤러리 '다정한 동행전'에 참석한 조각가 전뢰진.
2016년 11월 2일 마포구 서교동 인사갤러리 '다정한 동행전'에 참석한 조각가 전뢰진.

처음 만난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자네는 몸에 좋은 막걸리 대신, 왜 맥주나 소주를 마시는가? 내가 일생 동안 온갖 술을 다 마셔봤지만, 막걸리가 최고인 듯하네. 앞으로 막걸리를 마셔보도록 하게.

​김성복 교수는 수십 년째 한결같이 스승의 날과 두 번의 명절에는 반드시 스승 전뢰진 작가를 찾아뵌다. 작가와의 세 번째 술자리는 아마도 스승의 날 즈음이었던 것 같다. 술자리에서 작가는 기분 좋을 때 부르는 노고지리가 부른 찻잔이란 옛날 유행가를 제자들과 나지막한 목소리로 흥얼거렸다.

술자리가 끝나고, 제자인 김성복 교수의 손을 꼬옥 잡고 집으로 가는 뒷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아닌, 한 인간과 한 인간의 따뜻한 마음이 서로 하나가 되었던 너무나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가끔 상대방의 마음을 엿보고 싶을 때는 나의 마음의 그릇을 비운다. 텅 빈 그릇 속으로 자연스럽게 상대방의 마음, 생각, 의도가 흘러들어온다. 그 순간 상대방의 생각을 읽는다. 하지만 전뢰진 작가의 마음은 읽히지 않았다. 작가가 고도의 전략가라서 였을까? 마음이 너무 맑고 투명해서 읽힐게 없었던 것이었다.

전뢰진 작품.
전뢰진 작품.

노자 도덕경 55장은 含德之厚, 比于赤子 (함덕지후, 비우적자)라는 문구로 시작한다. 덕이 두터운 사람은 갓난 아이와 같다는 뜻이다. 전뢰진 작가는 노자 철학에 나오는 어린아이의 마음을 유지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평생 돌을 깎는 작업이라는 이름의 마음 수양을 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수양의 결과물 또는 잉여물을 우리는 전뢰진 작품이라고 부른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사용된 미술 용어로 화백과 각백이라는 단어가 있다. 화백은 원로 화가에 대한 존대어, 각백은 원로 조각가에 대한 존대어의 의미로 사용돼 왔다. 요즘은 작가라는 호칭이 일반적으로 널리 통용되는 추세인 것 같다. 그럼에도 화백이나 각백이라는 단어가 여전히 쓰이긴 한다.

​하지만 구순을 바라보는 전뢰진 작가에게 각백이라는 호칭보다는, 아직도 청춘이고 여전히 동심을 유지하기 때문에 작가라는 호칭이 훨씬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에게는 전 홍대 교수나 예술원 회원이라는 거창한 호칭보다, 막걸리와 돌 그리고 망치와 정만 있으면 언제나 행복한 조각가라는 소박한 문구가 딱 어울리는 작가다.

조각 9단 전뢰진 작가의 이러한 경지를 불교에서는 무심(無心), 노장에서는 동심 또는 자연스러움이라고 부른다. 이런 경지는 70여 년간의 돌조각 작업의 수행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전뢰진 작가의 또 다른 특징 하나는 술자리에서 말을 많이도 적게도 안 한다는 점이다. 유교철학에서 중시하는 중용의 자세다. 예술의 최고 경지도 철학이나 종교 또는 기타 분야에서의 최고의 경지와 일맥상통하다는 사실을 전뢰진 작가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조선시대 진정한 선비는 의관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마음 수양을 하는 삶을 추구하는데 물질에 대한 욕심을 경계한 것이다. 전뢰진 작가를 행사장에서 만날 때는 낡디낡고 유행이 한참 지난 양복을 입고 오신다.

양복 살 돈이 없어서는 전혀 아니다. 예술 이외에는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어서 일 것이다. 작업 이외에는 별로 할 줄 아는 것도 없어 보인다. 아마 취미도 작업일 것 같다. 규칙적이고 성실한 삶을 사는 작가에게 삶과 작업과 놀이는 하나다. 경계나 구분이 없다. 작업이 삶이고, 작업이 즐거운 놀이다.

전뢰진, '모자상'.
전뢰진, '모자상'.

위 두 개의 이미지 중에서 멀리 바다가 보이는 사진은, 부산 태종대 전망대 입구에 세워진 높이 2m, 너비 1m의 어머니가 남매를 팔에 안고 있는 모습의 석 조각 모자상이다. 과거 이곳에서는 매년 30명 이상이 자살하기 때문에 전망대 아래의 넓적한 바위를 자살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자살하지 마시오라는 문구까지 세웠었다고 한다. 하지만 부산시의 아이디어로 1976년 조각가 전뢰진 작가의 모자상을 설치한 후, 실제로 자살률이 큰 폭으로 줄었다고 한다. 이런 것이 예술 작품이 주는 보이지 않는 힘일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8년 동안 전뢰진 작가에게 작업 기법을 배우면서 스승을 보좌했던 김성복 교수의 추정에 의하면, 전뢰진 작가는 대략 천여 점의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작업실에 가보면, 딱 한 점의 작품만이 남아있다고 한다.

만드는 작품 모두가 다 팔렸고, 남아 있는 한 점의 작품은 구입자의 실수로 부분적으로 살짝 파손돼서, 수리해 그냥 작업실에 둔 것이란다. 전뢰진 작가는 무척 행복한 작가임에 틀림없다. 작품이 모두 팔려서가 아니라, 모든 작품이 사랑받아서일 것이다. 

제자 김성복 교수가 이야기해준 전뢰진 작가의 인생철학은 당나라 시인 이백의 고사에서 유래된 철저마침(鐵杵磨鍼)이라고 한다. 쇠공이를 갈아서 바늘을 만든다는 철저마침 정신이 작가에게는 돌을 깎고 무수히 많은 두드림을 통해서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인내심일 것이다.

작가에게 완성된 작품은 없다. 어쩌면 살아 있는 동안 만든 모든 작품은 미완성일지 모른다. 노자가 말했던 대기만성이란 말처럼 말이다. 작가가 망치와 정을 놓는 순간, 그동안 만들었던 모든 작품이 비로소 완성되는 것은 아닐까?

2018. 05. 17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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