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상설 화랑의 현재, 그리고 1956년 한국 근 현대미술의 재발견
한국 상설 화랑의 현재, 그리고 1956년 한국 근 현대미술의 재발견
  • 왕진오
  • 승인 2018.06.11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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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포=왕진오 기자] 2011년 3월2일 소공동 롯데호텔 1층의 작은 공간으로 백발의 원로 화가와 그들의 가족들이 작은 공간에 속속 모여 들었다. 먼 발치에서 보아도 그들의 걸어온 연륜을 확인 할 수 있는 풍광을 띠고 있었다. 

'2011년 전시 오프닝에 함께한 권옥연,김종하,백영수,윤명로,황용엽 작가'.(사진=왕진오 기자)
'2011년 전시 오프닝에 함께한 권옥연,김종하,백영수,윤명로,황용엽 작가'.(사진=왕진오 기자)

김종하(1918~2011), 백영수(1922~), 권옥연(1923~2011), 황용엽(1931~),윤명로(1936~) 등 한국 근 현대미술의 변화를 주도해 온 원로작가 5인이었다.

특히, 김종하, 백영수 화백은 한국화단의 뿌리로 평가 받는 박수근,이중섭,장욱진 등과 일본 동경, 6.25 전쟁 중 부산 피난 지, 서울 등에서 같이 활동하던 동시대 작가들이다.
 
이들이 다시금 세상의 최전방에 등장하게 된 것은 1974년 6월 반도호텔이 롯데 그룹에 매각이 되어 폐쇄됐던 반도화랑이 다시금 롯데호텔갤러리로 개관을 하면서 비컨갤러리(대표 심정택)가 기획한 ‘1956 반도화랑, 한국 근 현대미술의 재발견’ 展 을 통해서다.

단순한 전시 공간의 탄생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의견도 있으나 롯데호텔 갤러리의 탄생은 한국 상업화랑의 효시라 불려온 반도화랑의 부활이라는 점에서 한국 상업화랑의 발자취를 다시금 되돌아 보게 한다.

'반도호텔 외경'.(사진=롯데호텔)
'반도호텔 외경'.(사진=롯데호텔)

한국 최초의 화랑은 개화기 서화가인 해강 김규진이 1913년 서울 천연동에 세운 ‘고금 서화관’이다. 1903년 해강 김규진이 고종의 명을 받고 일본에서 사진 기술을 배워와 한국 사람이 개설한 최초의 사진관인 천연당 사진관을 열었다.

여기에 부설된 고금당 서화관은 사진, 서화판매, 표구를 겸했으며, 이어 우경 오봉림이 세운 조선미술관은 서화작품을 전시 판매하는 한편 표구업도 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앙 문 앞에 해강(海岡) 김규진과 어린 청강(晴江)(장남 김영기)의 모습이 보이는 1915년 천연당사진관 전경'.(자료=한미사진미술관)
'중앙 문 앞에 해강(海岡) 김규진과 어린 청강(晴江)(장남 김영기)의 모습이 보이는 1915년 천연당사진관 전경'.(자료=한미사진미술관)

해방 후 동인화랑, 화신화랑, 대원화랑, 대양화랑 등이 명동 등에 생겨 났으며, 1950년 9.28 서울 수복 후 수화 김환기 화백이 종로2가에 종로화랑을 설립하여 작가 자신의 그림을 판매하였으나 곧 바로 없어진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초기 상설화랑의 전성기,반도화랑의 흥망과 성쇠#

반도화랑은 외국 무역상사의 서울영업소인 공리 양행의 책임자 조셉 짐머만의 부인인 실리아 짐머만 부인에 의해 조직된 ‘서울아트소사이어티’가 1956년 3월 반도호텔 로비 한 켠에 설치된 장소에서 시작된 반도화랑의 최초 설립자가 되며, 이때 개관에 일등 공신이 당대 저명한 화가였던 김종하와 미군 사이에서 나름 유명 화가였던 박수근의 2인 전이 개관 전으로 개최됐다.

'반도호텔 외경'.(사진=롯데호텔)
'반도호텔 외경'.(사진=롯데호텔)

초대관장 실리아 짐머만(Celia Zimmerman)부인이 미국으로 귀국하는 1956년 말까지 화랑을 맡았고 2대 관장에 도상봉이 1957년 12월31일 까지 운영하다가 경영난으로 폐쇄하게 된다.

1954년 아시아 재단 발족 후 한국 국가 발전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초기에는 사회 문화 부문을 지원해, 1958년 1월 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인 반도호텔 1층 구석에 위치한 6.5평 규모의 작은 화랑을 열어 근대 화랑의 효시로서 명분을 살려 재설립(아시아재단 기록)됐다. 당시 박호열씨가 관장이 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1959년 11월 아시아 재단의 경제적 후원 중단 이후 이대원 관장이 인수 인계해 1969년 까지 자립 경영을 시작하게 된다. 1960년 4.19 이후 반도호텔 규정 변경으로 인한 임대료 특혜 철회로 1년간 임대료를 체납하여 폐쇄 위협을 받다가 1961년 5.16 이후 여러 차례 진정으로 30% 할인 조치까지 받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인사동 구 선화랑 외경'.(사진=선화랑)
'서울 인사동 구 선화랑 외경'.(사진=선화랑)

반도화랑 운영 당시 1961년부터 1968년까지 근무했던 현대화랑의 박명자 회장이 1970년 4월 현대화랑을 설립하기 까지 상설화랑의 초기 전성기를 이루게 됐다. 이후, 진화랑과 선화랑 등이 개관을 한 이후 현재 까지 상업 화랑의 좌장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2011년 반도화랑과 한국 근 현대 미술의 재발견#

현대 미술계에서 화랑의 역할은 미술시장을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축으로 부각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반도화랑의 역사적 의의는 한국 상업 화랑의 입지를 구축하게 된 명실 상부한 효시로 평가 할 수 있다.

당시 미군정을 통한 근대 미술품 거래의 본산이었던 반도화랑은 박수근, 장욱진, 변관식, 이상범, 도상봉, 김환기, 유영국, 이대원 등 근대 미술계의 거장들을 해외에 소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950년대 일본이 아시아권에서 유일하게 선진국에 속하던 시절 동경에만 상설화랑이 100개소 가깝게 개설된 상황에서 한국에 상설화랑이 전무하던 시절 독보적으로 해외를 지향한 한국 미술의 첨병역할을 수행 한 것으로 평가 할 수 있다.

반도화랑이란 이름은 오늘날 롯데호텔갤러리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다시금 다가왔다. 이름은 시대의 굴곡 속에 변화를 가져왔지만 개관 당시 활동하던 작가들은 여전의 그들의 작품으로 시간의 흐름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2011년 개관전을 찾은 고 김종하 화백'.(사진=왕진오 기자)
'2011년 개관전을 찾은 고 김종하 화백'.(사진=왕진오 기자)

박수근과 함께 반도화랑 개관 작가이기도 했던 김종하 화백은 특유의 고요한 색채로 ‘현실적인 진정성과 환상적인 리얼리즘의 조화’를 이루었으며, 그만의 환상적인 세계에서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새롭게 구현해 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백영수 화백은 김환기, 유영국, 장욱진, 이중섭 등 신사실파 동인 중 유일한 생존 작가이다. 작가는 일본에서 청년기를 보내고 1945년 해방직후 귀국한다.

1950년,60년대 어수선한 사회 환경에서 작품 활동을 하다 70년대 후반 이후 돌연 프랑스로 활동 무대를 옮겼고, 이후 독창적인 자기 세계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1년 롯데호텔갤러리 개관전을 찾은 백영수 화백'.(사진=왕진오 기자)
'2011년 롯데호텔갤러리 개관전을 찾은 백영수 화백'.(사진=왕진오 기자)

지난 1월 영구 귀국 후 국내에서 갖는 첫 전시로 기록된다. “화가는 자유업이다. 프랑스에 갈 때 그렇게 오래 있을 줄 몰랐고, 또 완전히 귀국할지도 몰랐다” 면서 모든 것 으로 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화가 본능에 충실한 작가이다.
 

권옥연 화백은 동서양의 감성적 깊이와 차이를 한 화면에서 보여주고 있는데, 서구적 색감의 바탕에 동양의 향토적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전통적인 오일(유화)페인팅 작가로 마티에르의 특성을 잘 살리는 작가로 평가되어있다. “화가는 제대로 된 작품을 남겨야 한다”는 작가정신이 투철한 화가로 평가 받는다.

'PX 근무 당시 박수근(우측) 화백'.
'PX 근무 당시 박수근(우측) 화백'.

황용엽 화백은 평생 사람을 소재 삼아 그리고 있다. 어쩔 수 없는 굴레에 갇혀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불안정한 주인공의 내면을 대변하듯, 얼굴은 역 삼각형 이다. 간혹 등장하는 눈은 커다랗게 부릅뜨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전흔에 시달리고 빼앗긴 사람들의 벗겨진 상태의 모습들이 언제나 나를 되새기게 한다” 는 작가의 말처럼 전쟁의 트라우마는 그의 작품의 화두가 된다.

황용엽 화백은 한국전쟁 이전 평양미술대학에 잠시 다니다가, 1951년 1.4후퇴 때 고향을 떠났다. 서울로 내려온 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한 이력 덕분에 남과 북의 미술 교육을 체험한 거의 유일한 생존 작가이다.

윤명로 화백은 1960년대부터 우리나라에 번진 전위적인 추상화 운동인 앵포르멜(Art Informel)에 참여해 현대 미술의 획기적인 한 장을 넘긴 주인공이다. 그의 족적 자체가 회화 재료가 어떻게 동양의 전통적 미감과 유기적으로 만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동서양을 넘나드는 작가적 자유로운 필선 과 화면 구성으로 완성됐다.

2011년 개관식에 참석한 좌상봉 롯데호텔대표이사,황용엽,백영수,김종하,권옥연,윤명로,심정택 비컨갤러리 대표.(사진=왕진오 기자)
2011년 개관식에 참석한 좌상봉 롯데호텔대표이사,황용엽,백영수,김종하,권옥연,윤명로,심정택 비컨갤러리 대표.(사진=왕진오 기자)

이번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자칫 일제 시대의 제도화된 미술 교육에 매몰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6.25 전쟁으로 제대로 된 교육이나 작품 활동을 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 유학 등 변화와 혁신을 자신들의 행동 양식으로 삼아 한국 근 현대미술의 아젠다를 일으켜 세운 작가 군으로 평가 받는다.

이번 1956 반도화랑, 한국 근 현대미술의 재발견 전을 통해 우리는 한국 상업 화랑의 효시였던 반도화랑의 부활과 당시를 풍미했던 작가들을 현장에서 만나는 소중한 시간을 가지게 됐다.

역사는 기억하기 원하는 것을 기억한다고 한다. 자칫 과거에 묻혀 우리의 기억의 세포 속에서 사라져 버릴 수 있었던 한국 미술의 기원에 대하여 이들을 통해 다시금 뿌리를 찾아낸 것은 왜곡된 현실이 아닌 역사적 사실은 언제라도 분명하게 오늘을 각인 시킨다는 현실을 되새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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