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에디터 나하나의 월드리포트] 스위스 바이엘러 재단 미술관 'Bacon Giacometti, 인간의 심연을 공명하다'
[아트에디터 나하나의 월드리포트] 스위스 바이엘러 재단 미술관 'Bacon Giacometti, 인간의 심연을 공명하다'
  • 나하나 기자
  • 승인 2018.06.28 13: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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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아트에디터 나하나] “나는 지성이 결코 만들 수 없는 작품을 만들었다.”(프란시스 베이컨),“예술은 내가 외부세계를 보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일 뿐이다.”(알베르토 자코메티)

'바이엘러 미술관 'Bacon Jiacometti' 특별전시 전경'.(사진=나하나)
'바이엘러 미술관 'Bacon Jiacometti' 특별전시 전경'.(사진=나하나)

스위스 바젤시의 리헨 지방에 위치한 바이엘러 미술관에서 'Bacon Jiacometti' 특별전시가 10월 2일까지 진행된다. 이 전시는 바이엘러 미술관의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바이엘러 재단과 자코메티 재단이 주최가 되어 마련한 전시로 그 스케일이 매우 광대해 마치 살아생전의 ‘에른스트 바이엘러’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케 한다.

‘프란시스 베이컨’과 ‘알베르토 자코메티’

‘바이엘러 미술관’ 은 총 16개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시는 1층에 위치한 7개 관 중 7관 한 관에서 진행됐다. 그러나 7관 하나만 무려 8개의 룸으로 나뉘어져 있어 100여 점의 전시 작품과 아티스트들의 영상을 보여주는 스펙트럼 스튜디오까지 구성을 했음에도 부족함이 없어 역시 전 세계의 유명 미술관의 위상을 보여 주었다.
 
전시공간의 컨디션이나 작품의 구성에 따른 전시의 배열, 전시의 전개방식 역시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으며, 탁월한 공간구성과 드라마틱한 설정으로 스토리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기획자들의 뛰어난 전문성이 돋보여 절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전시에서 미술관 측은 무려 100점의 회화와 조각 작품들을 미국과 유럽의 주요미술관과 개인컬렉션의 대여를 통해 준비한 전시였다고 한다.
 
물론 바이엘러 재단과 자코메티재단을 비롯, 예술가 관리자 재단 등의 보이지 않는 힘과 큐레이터들의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재량이 더해짐은 응당 당연한 일일 것이다.
 
실제로 이 전시는 이달 18일에 막을 내린 스위스 아트바젤 기간 동안, 전 세계 미술계의 굵직한 개인 컬렉터들과 가고시안, 테이트 모던, 소더비, 크리스티, 구겐하임 등의 미술계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의 발길을 사로잡았다.

'바이엘러 미술관 'Bacon Jiacometti' 특별전시 전경'.(사진=나하나)
'바이엘러 미술관 'Bacon Jiacometti' 특별전시 전경'.(사진=나하나)

#베이컨과 자코메티, 자코메티와 베이컨#

이 둘은 너무나 실제로 너무 다른 성격을 가졌으며, 실제로 같은 시기에 활동했으나 너무 다른 성격으로 하여금 친분관계가 두텁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이 만난 것은 1965년 런던 테이트 갤러리 앞에서의 만남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그들 사이에는 ‘이자벨’이란 한 여성이 있었는데, ‘이자벨’은 3개월이란 짧은 시간을 알베르토 자코메티와 함께 보낸 그의 뮤즈들 중 한 명이다. 그는 자코메티에게 베이컨을 소개했다고 한다. 그러나 너무나 다른 성격차로 인해 그 만남이 이후에 만남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사실 두 화가의 성격은 공통점을 찾을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판이하게 다르나, 그 사유에 있어 놀랄 정도로 닮은 점이 많은 화가들이다.
먼저 그들은 작품의 예술적 사유의 주체를 ‘인간 형상’에서 가져 왔다는 데에 중점을 두며, 작품의 느낌은 상반되나, 둘 다 사람을 파괴시키고 파편화시키면서 그들 자신의 내적인 부분을 점령했다.

둘째로 인간의 개성을 초상화에 묘사하였는데, 둘 다 매우 심각한 강박적 방식으로 초상화에 이를 표현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작품의 표면적인 부분을 보았을 때, 둘 다 리얼리즘 화가로 구분할 수 있으나 인간 내면의 탐구 방식에 있어서는 추상주의 방식을 구현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베이컨과 자코메티. 사실 그들에 의해 그려지는 것은 다름 아닌 감각이다. 다른 층리에 있는 감각들을 이들 작품의 형상들의 오묘한 조합이 이끌어 내는 것이다. 두 형상은 다른 듯 공통적으로 신체들에 대한 일종의 자율성을 획득하였으며 어떤 돌발의 흔적 속에서 공통적인 현상또한 찾아낼 수 있다.

사실 상 이번 전시는 거의 완벽한 마리아주 라 할 수 있으며, 감각의 짝짓기 같은 느낌도 든다. 그들의 작품 형태는 비구상적인 느낌을 넘어 감각의 응고, 응축된 형태의 집결이며, 형태들의 집합이다.

베이컨과 자코메티의 전시를 보며 이들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예술이란 인간을 중심으로 사는 이 세상에서 격투나 투쟁이거나 혹은 껴안음과 공명을 할 수 있는 매개체다.’라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바이엘러 미술관'Bacon Jiacometti' 특별전시 모습'.(사진=나하나)
'바이엘러 미술관'Bacon Jiacometti' 특별전시 모습'.(사진=나하나)

#프란시스 베이컨(1909 – 1992)#

2013년 뉴욕의 크리스티 경매에서 ‘루시안 프로이트를 모델로 한 습작 3부작(Three studied of Lucian Freud)’이 1억 4천 2백 4십만 달러(우리 돈 1천 5백 2십여억원)에 낙찰되면서, 전 세계의 미술시장은 흥분에 휩싸였다.

이는 영국 표현주의 회화의 거장 ‘프란시스 베이컨’ 의 작품으로, 그때부터 그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비싼 화가라는 닉네임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사실 프란시스 베이컨은 1992년 82세로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전 세계 유명 미술관에서 전시를 하며 예술성을 인정받음은 물론, 당대 최고의 예술가로 크게 명성을 떨친 아티스트다. 

그는 사교계의 유명인사로 화려한 삶을 살았으며 승승장구하던 사람이었다. 물론 그에게도 어려움은 있었다. 작업 초기 시절, 많은 비평가들이 "그의 작품은 캔버스와 종이위의 배설에 불과하다"라는 독설을 퍼부으며 부정적인 평가와 혹평을 서슴치 않았다. 이에 자기 비판적 성격이 강했던 베이컨은 자신의 그림 대부분을 스스로 파기해 버림으로써 현재 1929~ 1940년까지의 그의 작품은 고작 15점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는 과거 종교화의 재단화의 양식인 삼면화의 방식을 이용해 그림을 그렸고, 그 작품은 1950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그와 동시에 그의 삶 역시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공을 거듭하던 베이컨의 삶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그는 16세에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알았으며, 그 이후로 공개적인 동성애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의 연인들은 모두 죽거나 그를 떠났고, 마지막으로 재회하려던 연인은 결국 자살을 했다. 베이컨은 죽기 전까지 그림을 그렸으나, 결국 1992년 마드리드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바이엘러 미술관'Bacon Jiacometti' 특별전시에 설치된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사진=나하나)
'바이엘러 미술관'Bacon Jiacometti' 특별전시에 설치된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사진=나하나)

*베이컨의 작품 세계는 어떨까?*

베이컨은 사람의 인체를 마치 정육점의 고깃덩어리와 같은 기괴한 느낌이나, 도살장에서 나온 살덩어리들 같은 묘사를 함으로써 전 세계의 미술 애호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베이컨의 작품은 매우 그로테스크 하며, 인간의 폭력성과 잔인함이 돋보임과 동시에 존재적 불안감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작품을 처음 마주하는 사람들은 소름이 돋는 공포와 섬뜩함이나 잔인함을 느끼거나, 혹자는 그가 정신병의 소유자는 아닌지에 대한 의구심을 제시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의 작품들 중 '교황 시리즈'를 보면, 마치 교황의 쨍한 비명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느낌이 들며, 교황의 정신과 육체가 모두 공중으로 휘발되어 사라져 버리는 느낌이 들 것이다.

베이컨의 '교황 시리즈'는 당시 사회에 큰 이슈를 불러 일으켰으며, 지탄과 반발의 대상이었다. 베이컨은 프란체스코 교황을 모델로 그 작품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누구나 성스럽다고 생각하는 교황을 그렇게 표현했으니, 당시의 반응은 보지 않아도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러나 베이컨은 자신의 작품에 이러한 표현들을 나타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베이컨의 작품들에서 인물들의 표정을 보면, 마치 뭉크의 절규와 같은 느낌이 오버랩 되는 느낌이다. 베이컨은 뭉크에게 영향을 받아서 그것이 그의 작품을 통해 나타난 것이지만, 베이컨의 그림 속 입은 ‘공포보다 더 무서운 절규.’ 즉, 공포의 카타르시스 적 표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베이컨의 작품에서는 유독 입이나 치아의 강조가 자주 나타난다. 이는 그가 인간의 감정표현의 표상을 입으로 생각해서 나타난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바이엘러 미술관'Bacon Jiacometti' 특별전시'.(사진=나하나)
'바이엘러 미술관'Bacon Jiacometti' 특별전시'.(사진=나하나)

베이컨은 또 사람의 육체를 ‘날 것’의 상태로도 표현 하였다. 따라서 그렇게 표현된 작품 앞에 서서 그림을 감상하다 보면, 어디선가 비릿한 냄새가 주위를 진동하는 듯한 느낌과 더불어 깊은 절망감이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한다.

이는 결국 그러한 감정도 역시 인간으로써의 내 내면 어딘가에 숨어있을 감정의 얼굴과 맞닿아 공명을 하여 감각적으로 느껴진다는 생각을 하니, 역시 세기가 준 예술가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 모든 예술가들이 그러하듯, 베이컨 역시 자신의 그림이 자신의 고유한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한 수단이었겠지만, 유난히 그의 작품에서 인간의 고뇌와 인간조건에 대한 불행이 느껴졌던 이유는 동성애의 삶을 살았던 ‘삶의 특이성’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동성과 사랑을 했지만, 그래도 당시 사회에서 시대가 주는 시선을 완전히 저버리기는 힘들었으리라 본다. 따라서 그러한 감정들을 자신의 작품을 통해 인간의 신체를 왜곡시키거나 파괴시키는 방법으로 표출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는 미술사에 있어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전에 전통회화에 등장하는 인간신체의 관습적인 기준을 완전히 탈피시켰으며, 자신의 작품을 단순한 강령정도로 환원 시키는 평론가와의 관계를 끊어 놓기 위해서도 매우 많은 노력들을 했다고 한다.

자신의 작품에 ‘끔찍함’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으며, 회화에서 우연의 요소(물감 한 방울이 그림의 주제를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는 주장)의 역할을 강조했다고 하는 걸 보니, 누군가 자신의 삶을 평가하거나 규정하는 것을 끔찍하게 생각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래서 일까. 그의 작품에 대한 해석은 천차만별이며, 여전히 우리는 그의 작품에 대해 할 말이 많고, 사유할 것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이컨은 자신의 작품에 ‘유희’를 대중은 ‘진지함’을 고집했다고 하니 이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해하다.

이 전시를 보는 동안, 유독 사람들의 발걸음이 베이컨의 작품 앞에 정지되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어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낮은 목소리로 의견을 교환했고, 어떤 사람들은 침묵을 유지한 채 그의 작품을 한참동안 응시했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그림들,’과 ‘그것을 그린 화가의 힘.’에 대해 생각했다. 바로 그러한 힘을 가졌기에 ‘20세기 이후 현대미술사의 중심인물’이 되는 것은 응당 당연한 결과라 본다.

'바이엘러 미술관'Bacon Jiacometti' 특별전시에 소개된 알베르토 자코메티 작품'.(사진=나하나)
'바이엘러 미술관'Bacon Jiacometti' 특별전시에 소개된 알베르토 자코메티 작품'.(사진=나하나)

#알베르토 자코메티(1909-1992)#

2010년 2월 런던의 소더비 경매에서 ‘작품 가리키는 사람(L’Homme au doigt)‘이 65000만 파운드(1억 432만 7천달러)에 낙찰되면서 경매사상가 최고 기록을 세웠다. 비정상적으로 깡마르고 길게 늘어뜨린 앙상하고 거친 이 조각상은 바로 스위스의 실존주의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작품으로 이에는 인간의 고독을 응시하는 그의 깊은 통찰력이 스며있다.

그는 미술사에 있어서 자신만의 고유한 창작 스타일로 현대 조각사조의 큰 획을 그은 미술계의 거장이며, 현대미술에 있어 가장 전위적이고 현대적인 조각을 한 조각계의 1인자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영향을 받았으며, 일찍이 앙드레 브르통과의 교류를 통해 초현실주의 작가들과 어울렸으나, 인체의 형상에 대한 관찰을 중심으로 실물 습작을 시작하면서 초현실주의를 탈피했다.

사실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조각가 지오반니 자코메티의 아들이며 오귀스트 로댕의 조수인 앙투안 부르델 밑에서 공부를 하였으나, 눈에 보이는 것을 조각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꼈다. 또, 파블로 피카소, 호안 미로, 알렉산더 칼더 등의 당대 예술가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큐비즘과 추상주의에 눈을 뜨게 되었고 그 영향으로 그의 작품은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전율적 오브제 형태로 바뀌었다.

당시 자코메티의 작품은 추상주의자들에 의해 높게 평가 받았으나, 다시 형태를 묘사하는 조각에 몰두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작업이 우리 일상에 있는 꽃병이나 램프처럼 초현실주의나 실체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생각에 의해서이다.

'바이엘러 미술관'Bacon Jiacometti' 특별전시'.(사진=나하나)
'바이엘러 미술관'Bacon Jiacometti' 특별전시'.(사진=나하나)

사실 자코메티는 그러한 이유로 극심한 고통을 느꼈으며, 결국 실존하는 실체와 현상에 맞닿기 위해 다시 형태를 묘사하게 된, 즉 현대 우리가 경이롭게 감상하는 작품이 탄생하는 전환점이 된 것이다. 그는 작업일생은 늘 오랜 고독과 침묵이 함께 탄생시킨 것이라 하니, 그가 얼마나 많은 사유를 했을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는다.

자코메티는 ‘바라보고 있는 남자’라는 조상으로 작업 초기 시절부터 파리의 현대 미술가들에게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입체파와 추상주의와 함께 실재와 닮게 표현하는 것을 멈추었고, 삶과 죽음에 관한 은유적인 표현을 작품에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가 자신만의 사조를 구축하는데 있어 발단이 된 시점이 바로 이 시기인데, 이때부터 전위적이고 현대적인 자코메티만의 조각양식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매우 심플하며 간단한 듯한 조각양식. 그러나 자코메티의 조각은 단순한 조각이 아니다. 이는 그의 전 생애를 건 실험이며, 모험이며 미술사의 전환점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서 어떤 인물을 대할 때 주어진 실체를 그대로 대한다는 느낌을 그대로 드러내고 싶어했다. 어찌 보면 단순한 실험이 상상의 창작 공간에서 현실성을 불러 일으켰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바이엘러 미술관'Bacon Jiacometti' 특별전시'.(사진=나하나)
'바이엘러 미술관'Bacon Jiacometti' 특별전시'.(사진=나하나)

*자코메티의 작품세계는 어떨까?*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작품은 지극히 단순하다. 그의 작품에서는 조각 작품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인체의 아름다움과 조화는 찾아볼 수가 없으며, 극적인 단순함만 존재할 뿐이다.

자코메티의 작품은 인체를 묘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체의 외형을 구성하는 부피나 무게감, 장식성, 표정, 동작 등 거의 모든 것들이 생략되어 있으며, 가늘고 긴 골격만이 형태를 유지하며 불안하게 서 있을 뿐이다. 이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작품을 통한 ‘인간 실존의 고독’을 더욱 드러내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잔혹한 파괴와 대량학살 등을 겪은 전후화가다. 따라서 그의 눈에 보이는 인간상이란 어쩌면 비인간적인 문명 속에서 나타난 인간의 허무와 고독이라는 감정을 가진 존재로 느껴졌을지도 모르며, 조각의 겉치레는 문명과 결부시켜 쓸데없는 군더더기처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스위스 바이엘러 미술관'Bacon Jiacometti' 특별전시 전경'.(사진=나하나)
'스위스 바이엘러 미술관'Bacon Jiacometti' 특별전시 전경'.(사진=나하나)

오로지 리얼리티만을 추구했으며, 작품 활동을 하며 끝없는 사색과 사유를 통한 자기인식을 바탕으로 재창조의 과정을 거쳐 명확하게 드러내려고 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는 결국 눈에 보이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려는 시도를 했으며, ‘공허속에 허상’이라 표현되는 가느다란 묘선을 이용한 전무후무한 스타일의 조각상을 발표함으로써, 서유럽 조형미술에 있어 지금까지도 가장 현대적이고 전위적인 표현을 한 조각가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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