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정지에의 유우색(游于色), 색으로 그린 ‘팩션미학’ 진수
펑정지에의 유우색(游于色), 색으로 그린 ‘팩션미학’ 진수
  • 김재현
  • 승인 2018.07.29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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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포=김재현 기자] 중국 현대미술의 공통점 중 하나를 고르라면, 중국이 현대화의 급변하는 과정에서 초래된 여러 가지 사회적 갈등요소들을 담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제주현대미술관을 찾은 펑정지에 작가'.(사진=artinfo DB)
'제주현대미술관을 찾은 펑정지에 작가'.(사진=artinfo DB)

아마도 민주화 운동의 시대를 맞았던 1980년 이후 한국 현대미술의 변화양상과 유사하다고 볼 수도 있다. 특히 사회적 이슈의 중심엔 잠들었던 ‘인간 본연의 존재감’을 일깨웠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중반까지 거세게 몰아닥친 ‘중국 현대미술의 새로운 시류’에 펑정지(Feng Zhengjie)에 역시 중요한 지점을 차지해 왔다. 과연 지금의 펑정지에를 만든 일등공신은 무엇일까? 누가 뭐래도 ‘색깔’이다. 그가 주로 애용한 강렬한 붉은색과 선명한 녹색은 서로 만났을 때 ‘가장 위험하고 촌스러울 수 있는 불안정 조화의 보색관계’이다.

하지만 펑정지에는 그 보색대비가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창적인 조형어법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일명 ‘펑정지에 핑크’ 혹은 ‘원색의 마술사’라는 수식어를 만들어냈을 정도다.

펑정지에의 평소 복장이나 작업실 역시 작품속의 과감한 색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일상생활에 ‘원색의 조화’가 그대로 일체화된 셈이다. 이런 펑정지에 색의 출발은 오랜 세월 전해 내려온 중국 민간의 전통문양이나 그림들에서 찾을 수 있다.

어눌하면서도 투박한 원색의 부조화, 하지만 볼수록 정감이 넘치는 묘한 매력을 지닌 토속적인 미감 등 우리나라의 민화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된다. 펑정지에 역시 농촌에서 나고 자라서 그런 색감 코드에 익숙하며, 분명히 현재까지 자신의 작품에 유전인자처럼 배어나오고 있음을 고백한다.

'제주현대미술관 펑정지에 개인전 모습'.(사진=artinfo DB)
'제주현대미술관 펑정지에 개인전 모습'.(사진=artinfo DB)

펑정지에는 중국 전통적인 색감에서 차용한 강렬한 원색의 조화를 통해 ‘중국의 현대여성’을 그려왔다. 대장부 못지않은 과감하고 자신감 넘치는 중국 여인 특유의 성향을 대변한다.

하지만 밀물처럼 갑작스럽게 덮친 현대화 바람은 작품 속에서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말해주듯, 그녀들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불안정한 현실인 동시에, 제대로 꽃피지 못하고 정착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그것은 급변하는 중국 사회가 과연 어떤 미래를 맞을 것인가, 라는 중국인 전체가 스스로에게 묻는 화두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2007년과 2010년 그리고 2013년의 현재 싱가포르미술관 곽건초 관장은 “펑정지에의 작품은 표면적으로 사람을 유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 빛나는 아름다움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이상’을 환기시킨다.”고 평한 바 있다.

펑정지에, 'Portrait Series 2012 No.01'. 캔버스에 유채, 91x91cm, 2012.
펑정지에, 'Portrait Series 2012 No.01'. 캔버스에 유채, 91x91cm, 2012.

자신감 넘치는 표정과 헤어스타일, 빨아들일 것 같은 그윽한 미소, 탐욕스런 입술 등…. 더없이 요염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도상은 왠지 모르게 깊은 공허함과 슬픈 소외감을 숨기고 있는 듯하다. 아마도 인간의 다중적인 감정까지 포착한 결과일 것이다.

지금의 여인상 중심의 테마가 첫 선을 보인 것은 2000년 이후였지만, 2007년경을 기점으로 다른 양상을 보인다. 2007년은 작가의 어머니가 사망한 해이다.

그래서일까, 그 이전에는 일반적인 중국의 현대여성을 대변했다면, 이후엔 여인 개인의 감정변화를 좀 더 존중하고 집중했다고 볼 수 있다. 삶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더욱 관조적인 시선이 엿보인다. 비록 겉으로는 여전히 화려하고 강렬한 색조를 구사하지만, 속마음은 전혀 같이 않았을 것이다. 그 시기에 장미꽃과 해골 소재의 작품들이 태어난다.

서로 상방된 두 소재가 어우러진 작품을 통해 “누구의 죽음이라도 기억하라. 속으론 문드러져도 결국 삶은 즐거워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진정어린 화두를 던지는 듯하다. 2006~2007년 이후 독일, 대만, 네덜란드, 인도, 싱가포르, 한국,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등 전 세계적으로 러브콜을 받는다. 말 그대로 역대의 최고 호황기를 맞은 세계 미술시장의 주인공으로서 전성기에 올라선다.

펑정지에, 'The Painting of Modern Beauty 2013 No.03'. 캔버스에 유채, 122x91.5cm, 2013.
펑정지에, 'The Painting of Modern Beauty 2013 No.03'. 캔버스에 유채, 122x91.5cm, 2013.

그리고 2010년 전후로 또 한 번의 변화를 모색한다. 시각화 위주의 작업에서 점차 내면적 깊이를 더하는 사유적인 면모가 두드러진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보조적인 위치였던 녹색이 전면을 차지하고, 그 배경으로 수많은 꽃송이들이 부유하는 장면이다.

마치 서양회화에서 유한한 인간의 삶이 헛되고 덧없음을 ‘바니타스(Vanitas) 정물’로 표현했다면, 펑정지에는 흩날리는 꽃송이를 통해 동양적인 감성으로 재해석한 듯하다.

2012년부터는 좀 더 구체적인 변화를 일으키는데, 두상 표현에 머물렀던 여인의 모습이 전신표현으로 옮아간다. 이는 주인공의 메시지 전달이 표정 중심에서 제스처 중심으로 변화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여인을 통한 보다 구체적인 표현에 있어 자신감이 충만했음으로도 해석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변화는 중국 당나라의 유명 시(詩)가 ‘회화적 텍스트’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펑정지에,'Portrait Series 2013 No.02'. 캔버스에 유채, 150x100cm, 2013.
펑정지에,'Portrait Series 2013 No.02'. 캔버스에 유채, 150x100cm, 2013.

그 당시(唐詩)의 내용이 곧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의도를 대변하기도 한다. 의외의 현대적 미감으로 재탄생 펑정지에는 어릴 적부터 서화가(書畵家) 서비용을 흠모했을 정도로 서예를 즐겼으며, 현재도 틈틈이 붓글씨를 쓰고 있다. 중국 전통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럽게 민간예술의 순박한 원색조와 어우러져 ‘의외의 현대적 미감’으로 재탄생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두고 펑정지에는 “붓글씨를 잘 쓰고 못 쓰는 건 중요하지 않다. 서예를 기호화 하는 과정에서 평소 좋아하는 당시(唐詩)를 통해 중국 고전의 지식체계를 나만의 화법으로 옮겨 보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중국의 지략가 제갈량은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지만,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의 뜻”이라 했다.

제아무리 뛰어난 예술가의 창작품도 그 진가는 주변의 다양한 요소로써 진정한 완성을 이룰 수 있다는 뜻과도 통할 것이다. 펑정지에는 장샤오강, 탕즈강 등 중국 현대미술을 이끌고 있는 대다수의 사천미술대학교 유화과 출신 작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최근 새로운 작품으로 또 한 번 더 높은 비상을 시도하고 있다. 우리는 과연 펑정지에의 지칠 줄 모르는 그 열정적인 행보를 어떻게 보고 응원할 수 있을 것인가? 펑정지에가 그동안 보여준 일련의 작품들을 보면, 논어(論語)의 “지어도(志於道) 거어덕(據於德) 의어인(依於仁) 유어예(遊於藝)”라는 대목이 떠오른다.

이는 “도(道)에 뜻을 세우고, 덕(德)을 근본으로 하며, 인(仁)을 기준으로 삼아, 예(藝)를 자유자재로 즐겨라”는 뜻이다. 특히 마지막 ‘유어예(遊於藝)’는 삶에 있어 예술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짐작케 한다.

'제주현대미술관 개인전 작품과 함께한 펑정지에 작가'.(사진=artinfo DB)
'제주현대미술관 개인전 작품과 함께한 펑정지에 작가'.(사진=artinfo DB)

논어의 ‘유어예(遊於藝)’는 삶의 행복을 위해 ‘예(藝)를 자유자재로 즐겨야 한다’고 했다면, 펑정지에는 자신의 작품에서 또 다른 기쁨을 찾기 위해 ‘색(色)을 통해 마음껏 즐김’으로써 ‘유우색(游于色)’의 경지를 이루고 있다. 또한 펑정지에의 작품은 현실(fact)과 이상(fiction)의 경계(Faction)를 보여준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지극히 화려하고 환희에 찬 이상적인 삶을 꿈꾸고 있지만, 곧 사그라질 꽃의 숙명처럼 현실은 결코 만만치 않음을 말하는 듯하다. 어쩌면 그녀들은 지금 끝없이 벗어나고 싶은 현실의 속박과 꿈속에도 그리는 피안의 미래에 제각각 한발씩 딛고 선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펑정지에의 그림은 현재진행형이다. (글=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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