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도균의 그림 이야기] 조각조각 10 '김화람 작가 이야기'
[권도균의 그림 이야기] 조각조각 10 '김화람 작가 이야기'
  • 권도균
  • 승인 2018.08.08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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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아트스페이스 H] '삶의 의미와 자아의 본질에 관한 물음을 던지는 김화람 작가의 욕망 이야기'

​"탐욕은 걱정을 낳고, 탐욕은 두려움을 낳는다. 탐욕이 없다면, 어찌 걱정과 두려움이 있겠는가? (貪欲生憂, 貪欲生畏, 無所貪欲, 何憂何畏, 法句經, 愛好品)"

'전시 전경'.
'전시 전경'.

불교에서 인생은 괴로움이라고 말한다. 괴로움의 근원은 진리를 알지 못함(無明)에 있다. 고통스러운 삶이 무수하게 반복되는 이유는 세 가지 독, 욕망, 증오, 어리석음 때문이다.

이 중에서 욕망은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동력이면서도, 아이러니하게 윤회의 원인이고, 괴로움의 근원이 된다. 욕망은 자신을 향한 것이고, 증오는 타인과의 관계성, 어리석음은 유한한 삶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의 부재인 것이다.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삶의 의미와 나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계속 찾는 대신, 현재의 삶에 순응해서 살아간다.

형이상학 질문에 대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은 주로 수행자들과 철학자들이다. 하지만 김화람 작가는 예술가로서 이런 고민을 하는 듯싶다. 그리고 예술 작품을 통해서 관람자에게 철학적 화두를 던진다.

작가는 부산대 미대를 졸업하고, 영국 첼시대 석사와 홍익대 박사를 마쳤다. 작가는 스틸 판과 LED 빛, 텍스트의 관계를 이용해서, 색다른 공간을 연출한다. 스틸 판에 새겨진 텍스트를 뚫고 나오는 빛을 이용한 환영의 느낌을 통해, 차가운 금속과 따뜻한 빛 사이의 긴장감을 창출한다.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 청년작가 초대전, 빛 2016 전시에 설치했던 작품의 제목은 산스크리트어 ādīptagaya였다. 이 단어는 화택(火宅), 즉 불타고 있는 집을 의미한다. 화택(火宅)이라는 단어는 묘법연화경 비유품에 등장하는 삼계화택(三界火宅)이라는 용어에서 차용한 것이다.

​삼계는 욕계, 색계, 무색계다. 인간들은 욕계에 살고 있는데, 번뇌로 가득한 인간세계를 욕망의 불타는 집으로 비유한 것이다. 따라서 불타는 집에서 빨리 밖으로 나와야 하는데,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불타는 집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작가는 스스로 묻고 답한다. 삶의 목적이 있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삶인가, 소유인가? 출구는 어디인가? 돈과 물질주의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깨우침을 얻어 세상을 초월한 존재가 아닌, 보통 사람이 불확실하고 예측할 수 없는 세상을 살아감은 무척 힘겹다.

욕망, 갈등, 걱정, 불안의 번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세상을 살아감은 미망의 수렁에 던져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곳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김화람 작가의 설치 작품인 SERVE·VANITAS·FETISHISM· EMPTY는 유리, 거울, 아크릴 판으로 구성된 세 개의 직사각형 형태의 작품이다. 미니멀리즘의 형식에 기반을 두고, 영어 단어를 통해서 작가의 사유를 전달한다.

​채움을 상징하는 Serve와 비움을 상징하는 Empty가 대조를 이룬다. 그 중간에 Vanitas (허영)과 Fetishism(物神崇拜)라는 단어가 보인다. 작가는 욕망의 끝은 공허함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성북동 길상사에 잠시 머물다 떠난 법정 스님의 무소유가 욕망에 대한 해답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인간은 끊임없이 욕망하도록 프로그래밍화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멈춤, 만족, 비움, 버림 등과 같은 단어가 절실히 필요한 시대인 듯싶다.

'GOT PURPOSE'라는 제목의 작품은 기다란 원통 모양의 양쪽 끝에서 푸른색과 붉은색의 LED가 점멸된다. 청색과 적색의 불빛은 물과 불, 낮과 밤, 채움과 비움, 보수와 진보, 남과 여, 등 이분법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결국은 하나의 뿌리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2500년 전 싯다르타가 분석한 것은 인간의 욕망이었다. 당시에는 인간 개개인의 노력으로 불타는 욕망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친 것이다. 하지만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부추기는 사회에서 인간의 욕망보다는 사회나 국가의 욕망 탓으로 인하여 화택이 아닌 화구(火球), 즉 불타는 집이 아닌 불타는 지구가 되어버린 듯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서울의 날씨는 39도를 넘나드는 불타는 도시처럼 느껴진다.

'전시 전경'.
'전시 전경'.

기업과 국가는 생산 증대를 통하여 과잉으로 물질을 만들고,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여 과소비를 조장한다. 소, 돼지, 닭은 더 이상 동물이 아니다. 동물로서의 삶은 없다.

인간의 식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공장에서 생산되는 상품에 불과하다. 어류도 마찬가지다. 무수히 많은 공산품들이 과도하게 생산되고 폐기된다. 환경오염으로 인하여 오존층이 파괴되어 지구는 불타는 중이다.

인간의 욕망을 다루던 철학이나 종교의 선을 넘어선 것처럼 보인다. 사회학의 영역으로 넘어간 것은 아닐까? 이제는 전 세계 지구인들이 동시에 욕망을 절제해야 하는데, 산업혁명 이후 산업화와 기계화를 통한 대량생산은 브레이크 없는 기차가 되어버렸다. 더욱 빠른 속도로 앞으로만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작가의 결론은 이렇다. 세계와 타자와의 공유와 섬김, 자기중심의 무게를 덜어내는 비움의 자세, 중용의 중도를 찾아감, 부질없는 탐욕의 헛됨을 아는 길의 물음은 세상의 일체가 끝내 텅 빔에 이르게 된다는 깨달음에서 연유한다.

산다는 것의 징표, 그것의 해답을 위해서 나와 사회 공동체의 관계, 그리고 고독과 자유가 무엇인가를 알아가는 세상 보기, 생각하기, 말하기, 행동하기는 자기 탈바꿈의 요체일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수행을 하던 싯다르타가 깨달은 세계는 아주 단순하다. 열반의 세계는 욕망의 촛불이 훅 불어서 꺼진 상태인 것이다. 깨달음의 세계는 고요하고 적막한 세계일까? 김화람 작가의 다음 작품의 화두는 어떤 단어로 표현될 것인지가 궁금해진다.

한국의 작가들은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한 부류는 작업이 너무 좋아서 작업을 하는 작가들과 작업을 수행과 동일시하는 작가들이다. 작업에 집중하는 그 순간, 작업하는 나라는 존재를 망각한다.

이것이 바로 삼매다. 무수히 반복되는 작업의 과정에서 집중을 통해서 영혼이 정화되고, 의식의 깊이가 깊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의 세계는 아닐까? 나의 존재를 잊어버리는 상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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