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색화 거목(巨木) 윤형근이 남긴 일기와 작품...한 시대를 표명한 증거
단색화 거목(巨木) 윤형근이 남긴 일기와 작품...한 시대를 표명한 증거
  • 이예진 기자
  • 승인 2018.08.10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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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포=이예진 기자] 한국 근현대 미술에 있어 커다란 획을 그었던 윤형근(1928~2007)은 충청북도 청주에서 1928년 4월 12일 파평 윤씨 문정공파 대종손이었던 윤용한의 6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참혹했던 역사적 시기에 청년기를 보냈다.

'생전의 윤형근 작가'.(사진=국립현대미술관)
'생전의 윤형근 작가'.(사진=국립현대미술관)

1941년 청주상업학교에 다니던 시절 미술에 재능을 보여 미술 반장도 하고 전국 상업학교 학생 작품 포스터 전람회에서도 입선했다.

1945년 졸업 후 미술공부를 하기 위해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할 계획이었지만, 태평양전쟁 마지막 도쿄 폭격,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폭격 등으로 유학이 좌절되어 상실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 후 집안의 권유로 미원금융조합에 서기로 입사했지만 1년도 안된 채 사직서를 제출하고 청주사범학교 단기강습과에 입학해 데생을 배웠다.

아버지와 형이 미술 공부를 반대해 쌀 두 말을 배낭에 메고 트럭을 타고 서울로 올라와 누나집에서 기거했고, 행상을 하며 등록금을 마련했다. 때론 재료 살 돈이 없어 버들가지를 태워 목탄으로 만들어 재생지에 그려가며 미술에 대한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1954년 당시 서울대 학장이던 장발(1901~2001)이 서울대 복학을 시켜주지 않아 윤형근이 김환기(1916~1974)에게 부탁해 홍익대학교 회화과에 편입했고, 1960년 3월 22일 김환기의 장녀 김영숙과 결혼했다.

윤형근, '드로잉'. 한지에 유채, 49x33cm, 1972.(사진=국립현대미술관)
윤형근, '드로잉'. 한지에 유채, 49x33cm, 1972.(사진=국립현대미술관)

당시 윤형근은 장인 김환기를 ‘아버지’라 부를 정도로 존경했고 김환기도 윤형근을 ‘아들’처럼 여겼고, 둘은 각별한 사제지간이기도 했다.

전쟁 중 피란 가지 않고 서울에서 부역했다는 명목으로 1956년에는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한 바 있으며, 유신체제가 한창이던 1973년에는 숙명여고 미술교사로 재직 중,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중앙정보부장의 지원으로 부정 입학했던 학생의 비리를 따져 물었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잡혀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는 총 3번의 복역과 1번의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그는 이른바 ‘인생공부’를 하게 되고, 극도의 분노와 울분을 경험한 연후인 1973년, 그의 나이 만 45세에 비로소 본격적인 작품 활동를 시작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진행 중인 윤형근 회고전 모습'.(사진=이예진 기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진행 중인 윤형근 회고전 모습'.(사진=이예진 기자)

윤형근은 스스로 ‘천지문(天地門)’이라고 명명했던 자신만의 작품 세계로 진입했다. 이 작품들은 하늘의 색인 블루(Blue)와 땅의 색인 엄버(Umber)를 섞어 만들어진 오묘한 검정에 가까운 색채가 탄생하는데, 거기에 오일을 타서 면포나 마포에 내려 그으면 ‘문(門)’과 같은 형태의 작품이 나오게 된다.

이 작품들은 검정색의 우뚝 선 구조들 사이로 무언가 다른 차원의 세계가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형태도 작업과정도 매우 단순한 이 작품들은 서툰 듯하면서도 수수하고 듬직한 멋을 지닌다.

윤형근 '다색' 설치 모습.(사진=artinfo DB)
윤형근 '다색' 설치 모습.(사진=artinfo DB)

제작 방법에서부터 그 결과까지 지극히 단순하고 소박한 이 작품들은 오랜 시간 세파를 견뎌낸 고목(古木), 한국 전통 가옥의 서까래,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흙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그는 이렇게 ‘무심(無心)한’ 작품들을 통해 한국 전통 미학이 추구했던 수수하고 겸손하고 푸근하고 듬직한 ‘미덕’을 세계적으로 통용될만한 현대적 회화 언어로 풀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진실로 서러움은 진실로 아름다움 하고 통한다." 1988년 윤형근의 일기에 적힌 것 처럼 1980년 광주항쟁의 소식을 접했을 때에는 쓰러지는 인간 군상을 연상시키는 일련의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윤형근, '다색'. 마포에 유채, 181.6x228.3cm, 1980.(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윤형근, '다색'. 마포에 유채, 181.6x228.3cm, 1980.(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그의 사후 11년 만에 대규모 회고전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8월 4일부터 막을 올렸다. 단색화의 범주에서 단편적으로만 알려졌던 윤형근의 진면모를 총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소중한 자리가 된 것이다.

전시 구성은 작가의 삶의 여정에 따른 작품의 변화를 총 4부로 나누어 소개한다. 1부에서는 작가의 작업 초기, 스승이자 장인인 김환기(1916-1974)의 영향을 보여주는 1960년대의 드로잉과 작품들이 전시된다.

윤형근의 조형언어가 발전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1부의 드로잉들은 상당부분 처음 공개된다. 2부와 3부에서는 다양한 색채에서 출발했던 그의 작업이 역사와 부딪혀 순수한 검정에 도달한 상태를 보여준다.

'윤형근의 작업노트'.(사진=이예진 기자)
'윤형근의 작업노트'.(사진=이예진 기자)

"형태와 색채, 과정과 결과과 더욱 엄격해지고 간결해지는 '심연(深淵)'의 세계 펼쳐"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4.19를 겪은 이후, 윤형근은 숙명여고 재직 시절(1961~73년) 상대적으로 나아진 작업환경 속에서 다수의 드로잉과 소품을 남겼다.

이 시기 그의 작품은 밝은 색채의 추상화로, 스승이자 장인인 김환기의 영향을 짙게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1973년 이른바 ‘숙명여고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은 이후, 그의 작품에서는 밝은 색채가 사라지고 전형적인 ‘검은’ 작품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 작품들은 검정색의 우뚝 선 구조들 사이로 무언가 다른 차원의 세계가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형태도 작업과정도 매우 단순한 이 작품들은 서툰 듯하면서도 수수하고 듬직한 멋을 지닌다.

"이 땅 위의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시간의 문제이다. 나와 나의 그림도 그와 같이 될 것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된다.”

1980년대 후반 이후 제작된 윤형근의 후기 작품은 한마디로 말해 한층 더 간결해진다. 색채는 검은색의 미묘한 변주가 사라진 채 ‘순수한 검정’에 더욱 가깝고, 물감과 함께 섞었던 오일의 비율도 줄어들면서 화면은 한층 건조해진다.

윤형근, '청다색(Burnt Umber&Ultramarine)'. 마포에 유채, 33.5x45.5cm, 1988.(사진=국립현대미술관)
윤형근, '청다색(Burnt Umber&Ultramarine)'. 마포에 유채, 33.5x45.5cm, 1988.(사진=국립현대미술관)

형태와 색채, 과정과 결과가 더욱 엄격해지고 간결해지지만, 그 거대하고 순수한 검정색 앞에 서면 관객은 왠지 모를 ‘심연(深淵)의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그의 후기 작업은 어떤 ‘확신에 찬 통찰’을 보여주며, 존재와 존재 간의 ‘관계’, 그리고 ‘고독’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1983년 서교동에 스스로 설계한 집을 짓고 2007년 작고할 때까지 거주했는데, 그렇게 24년간 함께 했던 그의 생활공간과 작업실을 전시장에 옮겨왔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8전시실에 재현된 윤형근 화백의 작업실'.(사진=이예진 기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8전시실에 재현된 윤형근 화백의 작업실'.(사진=이예진 기자)

거기에는 그가 사랑했던 목가구와 목기, 도자기와 토기 등 조선의 공예품들이 가득하고, 추사 김정희의 글씨, 김환기의 그림, 최종태의 조각, 그리고 도널드 저드의 작품 등이 함께 했다.

그와 관계 맺었던 인물들, 사물들, 그리고 윤형근 자신의 일기, 노트, 사진, 드로잉 등 각종 아카이브를 통해, 윤형근이 추구했던 정신세계, 그리고 그의 예술관을 엿볼 수 있다. 전시는 12월 16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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