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황제 고종 초상 사진 최초 공개...'궁중미술' 통해 근대미술 조명
대한제국 황제 고종 초상 사진 최초 공개...'궁중미술' 통해 근대미술 조명
  • 이예진 기자
  • 승인 2018.11.16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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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포=이예진 기자] 한국 근대미술사의 기점인 대한제국 궁중미술을 조명한 ‘대한제국의 미술-빛의 길을 꿈꾸다’전 개최한다. ‘대한제국의 미술-빛의 길을 꿈꾸다’ 전은 대한제국시대(1897~1910)라 불리는 고종과 순종 시기의 궁중 미술을 조명하는 전시다. 

'고종 어진'. 1918, 비단에 채색, 162.5x100cm, 국립고궁박물관 소장.(사진=국립현대미술관)
'고종 어진'. 1918, 비단에 채색, 162.5x100cm, 국립고궁박물관 소장.(사진=국립현대미술관)

그간 대한제국 시기의 미술은 조선 시대의 우수한 미술 전통이 급격히 쇠퇴한 것으로 인식돼 왔으나, 최근 대한제국의 역사가 새롭게 서술되며 대한제국의 미술도 과거 미술의 전통과 외부의 새로운 요소들이 수합되어 한국 근대미술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번 전시는 1부 ‘제국의 미술’, 2부 ‘기록과 재현의 새로운 방법, 사진’, 3부 ‘공예, 산업과 예술의 길로’, 4부 ‘예술로서의 회화, 예술가로서의 화가’ 등 4개의 주제로 구성되며, 국내 최초 공개되는 ‘대한황제 초상사진’, ‘곽분양행락도’, ‘자수매화병풍’ 등을 포함해 김규진, 변관식, 안중식, 채용신 등 대한제국 시기 대표작가 36명의 회화, 사진, 자수, 도자, 금속 공예 등 총 200여 점이 전시된다.

1부 ‘제국의 미술’에서는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바뀌며 발생한 미술의 변화와 전개를 살펴본다. 궁중미술의 경우 규범성이 강한 장르인 만큼 대한제국이 성립된 이후에도 조선 후기 이래의 전통이 이어졌지만 왕에서 황제가 된 고종의 지위에 맞추어 황제와 황후에게만 허용되는 황색의 용포와 의장물이 어진과 기록화에 등장하는 변화를 엿볼 수 있다.

김규진, '대한황제 초상'. 1905년 추정, 채색 사진, 33x22.9cm, 뉴어크미술관 소장.(사진=국립현대미술관)
김규진, '대한황제 초상'. 1905년 추정, 채색 사진, 33x22.9cm, 뉴어크미술관 소장.(사진=국립현대미술관)

조선의 제26대 임금인 고종(1852~1919)의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다. 철종이 왕자 없이 사망하자 왕족이던 고종은 12세에 임금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혁명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고, 일본과 중국을 비롯한 열강의 간섭으로 조선 왕조는 위기에 처했다. 

이에 고종은 1897년 나라의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자신의 지위도 왕에서 황제로 높였다. 검은 익선관을 쓰고, 황제를 상징하는 노란색 황룡포 차림의 고종은 금박으로 용머리로 장식한 붉은 어좌에 앉아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는 근엄한 모습이다. 1901년 고종의 어진을 그렸던 채용신(蔡龍臣, 1850~1941)이 후대에 다시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제국 황실의 흥망성쇠가 고스란히 녹아 든 작품이라 할 수 있는 ‘해학반도도(海鶴蟠桃圖)’는 12폭의 대형 병풍으로, 조선 전통에서는 보기 드문 화려한 채색과 금박을 활용해 서운(瑞雲)과 천도(天桃) 위를 나는 10마리의 학을 그렸다. 금분으로 쓴 ‘군선공수임인하제(羣僊拱壽壬寅夏題)’라는 제발은 이 작품이 임인년 여름, 황실에 바쳐진 그림임을 알려준다. 

해학반도도(海鶴蟠桃圖), 비단에 채색과 금박, 227.7 x 714cm,1902년 추정. 호놀룰루미술관 소장. Collection of the Honolulu Museum of Art, Gift of Anne Rice Cooke, 1927. (사진=국립현대미술관)
해학반도도(海鶴蟠桃圖), 비단에 채색과 금박, 227.7 x 714cm,1902년 추정. 호놀룰루미술관 소장. Collection of the Honolulu Museum of Art, Gift of Anne Rice Cooke, 1927. (사진=국립현대미술관)

특히 1902년 여름은 고종 황제의 기로소 입소와 황수성절을 기념한 진연이 열렸던 때이다. 활용된 금박은 대한제국과 황실의 번영을 축수하는 의미로 고안됐을 것이다. 이 작품은 역사의 부침 속에서 1922년 도미타 기사쿠(1859~1930)와 야마나카 상회에 팔려 1927년 미국 하와이에 소재한 호놀루루미술관이 소장하게 됐다. 

전시를 준비한 국립현대미술관 배원정 학예연구사는 “해학반도도(海鶴蟠桃圖)는 2007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었다가 약 10여 년만에 다시 공개되는 것이고, 이후에는 전시 될 기회가 없을 수도 있으니 이번 전시를 통해 꼭 감상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설명했다.

2부 ‘기록과 재현의 새로운 방법, 사진’에서는 국내 최초 공개되는 ‘대한제국 황제의 공식초상 사진’이다. 미국의 철도 및 선박 재벌이었던 에드워드 해리먼(Edward Henry Harriman, 1848~1909)이 1905년 10월 초 대한제국을 방문했다가 고종 황제로부터 하사 받았으며 해리먼 사후 1934년 뉴어크박물관에 기증됐다.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 19세기 말~20세기 초, 비단에 채색, 10폭병풍, 39.6x366cm,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 소장.(사진=이예진 기자)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 19세기 말~20세기 초, 비단에 채색, 10폭병풍, 39.6x366cm,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 소장.(사진=이예진 기자)

하사 당시 사진은 피나무로 제작된 사진보관용 상자에 넣은 채 전달됐다. 고종은 익선관(翼善冠)에 황제를 상징하는 황룡포(黃龍布)를 착용하고 일본식 자수병풍을 배경으로 전신 좌상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사진 대지의 우측 상단에는 ‘대한황제진 광무9년 재경운궁(大韓皇帝眞 光武九年 在慶運宮)’이라 묵서돼 있다. 사진이 촬영된 공간은 1904년 4월 경운궁 화재로 고종이 거처를 옮겼던 중명전(당시 명칭은 수옥헌) 1층 중앙 통로이다. 

‘김규진조상(金圭鎭照相)’이라 기록돼 있어 당시 궁내부 대신 비서관이었던 김규진이 미국 순방단에게 전달할 황제의 공식사진을 제작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황실 가족 사진’. 27x34cm,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사진=국립현대미술관)
‘황실 가족 사진’. 27x34cm,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사진=국립현대미술관)

지운영 이후 한국인이 촬영한 첫 고종 사진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고종의 뒤에는 오봉병 대신에 갈대와 국화, 붓꽃, 수선화, 새 두 마리가 시문되어 있는 일본 화조 자수병풍이 놓여있어 을사보호조약 직전의 정치적 혼란기에 전통적 상징 체계상에서도 와해가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3부 ‘공예, 산업과 예술의 길로’에서는 고종이 근대화의 일환으로 역점을 두었던 것 중 하나는 공예부문의 개량이었다. 전통 공예의 복구와 진흥을 위해 1908년 대한제국 황실의 지원으로 한성미술품제작소가 설립됐다. 그러나 자금난으로 1911년 운영주체가 바뀌고 명칭도 이왕직미술품제작소로 변경됐다. 

'백자꽃무늬병'. 높이 14.4cm, 입지름 11.5cm, 바닥지름, 1891-19139. (사진=국립현대미술관)
'백자꽃무늬병'. 높이 14.4cm, 입지름 11.5cm, 바닥지름, 1891-19139. (사진=국립현대미술관)

이 시기에 공예를 미술품, 미술공예품으로 처음 부르기 시작했고, 도안의 개념을 수용해 실용 기물이 아닌 감상용 공예품을 만들었으며, 나아가 선진 기술을 통해 제작된 물품을 자본주의 관점에서 제작, 판매, 소비, 향유하는 근대적 흐름을 파생시킨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다

전시장에는 ‘사층삼각탁자’가 모서리에 자리잡고 있다. 20세기 초 밤나무로 만들어진 이 가구는 실내의 구석 공간을 활용할 수 있도록 특별히 제작되었다. 당시 일본이나 서양 가구에서도 보기 힘든 독특한 형태이다. 

4부 ‘예술로서의 회화, 예술가’ 고종, 순종시기에는 도화서가 해체됨과 동시에 다양한 외부의 화가들이 궁중회화의 제작에 참여하게 됐다. 이들은 전문가로, 혹은 예술가로서의 대우를 받기 시작했는데, 서구와 일본으로부터 ‘미술’의 개념이 전해지게 된 사실도 주요한 배경이 됐다.

'국립현대미술관 대한제국의 미술전 전시 모습'.(사진=이예진 기자)
'국립현대미술관 대한제국의 미술전 전시 모습'.(사진=이예진 기자)

자연스럽게 과거와 같은 익명의 그림이 아닌 자신의 이름을 분명히 남긴 궁중회화들이 제작되기 시작했고, 화원들과 달리 작가의식을 토대로 보다 창작적인 차원에서 그림을 그렸다.

또한, 이들이 궁중회화를 제작해 보다 실력을 정교하게 가다듬고, 명성을 쌓으며 기성화가로 자리매김했다는 점에서 근대 회화에 있어 대한제국의 역할이 중요했음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그 대표적 인물인 안중식, 조석진, 김규진에 의해 설립된 서화미술회(書畫美術會)와 서화연구회(書畫硏究會)에서 양성된 화가들은 이후 근대 한국화단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김영기, ‘우리동네’. 종이에 채색, 70 x 134cm, 1994. 성균관대학교박물관 소장.(사진=국립현대미술관)
김영기, ‘우리동네’. 종이에 채색, 70 x 134cm, 1994. 성균관대학교박물관 소장.(사진=국립현대미술관)

바르토메우 마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바뀌며 보여주는 궁중회화의 표현방식 변화, 사진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등장과 이로 인한 시각문화의 변동, 산업공예와 예술공예의 분화, 그리고 예술가적 화가의 대두 등은 대한제국시기의 미술이 그저 쇠퇴기의 산물이 아닌 근대화시기 변화를 모색했던 치열한 시대의 결과물”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번 전시가 대한제국시기 한국 근대미술의 토대가 어떻게 마련되었는지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전시는 MMCA 덕수궁에서 11월 15일부터 2019년 2월 6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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