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도균의 그림 이야기] '예술에 관한 단상 5'
[권도균의 그림 이야기] '예술에 관한 단상 5'
  • 왕진오
  • 승인 2017.11.02 17: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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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아트스페이스 H] 고전 철학은 우주와 자연 그리고 인간을 탐구하고 분석하여, 보이지 않는 숨은 원리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현대 철학은 고전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여, 오늘날에 맞게 재해석하는 것이다. 텍스트 읽기를 통해서 얻어진 사유와 지혜를, 세상을 보는 자기만의 논리로 재구성하여 말이나 문자로 표현하는 것이다.​

'2017년 3월 홍콩 아트센트럴 전시장 모습'.(사진=왕진오 기자)
'2017년 3월 홍콩 아트센트럴 전시장 모습'.(사진=왕진오 기자)

음악은 자연의 소리를 모방하고, 미술은 자연의 형태를 모방해 표현한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의 범주는 산이나 바다뿐 아니라, 동식물과 인간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왜 인간은 자연을 모방해 표현하기 시작하였을까? 자연을 네모난 캔버스라는 사각형 틀안에 가두어 소유하고 싶어서였을까?​

자연의 모방에서 출발한 미술은 자연이 아닌 인간의 창조물을 모방하는 단계로 진화한다. 빌딩이나 자동차와 같은 인간의 창조물이 캔버스 안에 등장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철저히 상상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세계를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의 상상력조차도 자연에서 모티브를 차용한 것이다. 상상력도 자연에서 영감을 얻어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의 이해 방식도 철학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자신만의 시각과 사유를 통해서, 세상을 읽고 해석하여, 독창적인 언어로 표현해내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철학자의 책은 좋고 나쁨을 판단하기 위해서 적지 않은 시간을 소비하여 읽어야 하는데 비해서, 예술 작품은 불과 3초 만에도 느낌을 읽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예술 작품은 사유의 정수만을 효과적으로 담아내야 한다. 컬렉터의 눈을 붙잡는데 시간이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에서 어린 작가들의 글과 이미지를 보면, 빨리 성공하거나 유명해져야 한다는 조급함이 느껴진다. 남들과의 보이지 않는 비교 심리가 작가들에게는 심적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대부분의 스포츠 선수들은 40세 이전에 은퇴를 한다. 하지만 예술가는 40세부터 비로소 시작인지도 모른다.​

작가는 40세 이전까지는 기본기를 갖춘 상태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시각을 갖추어야 한다. 젊음으로 하는 스포츠와 달리, 나이가 들어가면서 얻어지는 경험과 감성이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가는 것이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

컬렉터들은 예술 작품을 진심으로 느끼고 감동해서 구매하는 경우도 있지만, 거래가 잘 되는 작가의 작품, 즉 브랜드를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품을 보기 전에 이미 브랜드에 눈이 가려져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현대인들은 브랜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파란색 캔 속에 담긴 펩시콜라보다, 빨간색 캔 속에 담긴 코카콜라가 더 맛있다는 선입견이 우리의 결정을 좌우한다. 현대 미술계의 브랜드는 자본력으로 가치를 만들고 파는 것이다. 작품이 개인적으로 맘에 들어도, 고가의 작품을 사는 경우에는 브랜드 작품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 구매자의 심리이기도 하다.​

어린 작가의 작품과 숙련된 나이 든 작가의 작품을 비교해보면, 분명 테크닉 하나만 봐도 차이를 구분하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비슷한 연령대의 숙련된 작가들이 만든 작품들에서 예술적으로 좋고 나쁨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판단의 기준 자체가 아예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동일한 동양화 재료를 사용하고, 산수나 사군자 같은 한정된 소재를 주로 그렸다.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많지 않았다. 따라서 그림들을 비교하기도 쉽고, 비교하면 잘 그렸는지 못 그렸는지 판단하기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미술은 다양한 재료와 복잡다단한 소재 그리고 컴퓨터나 사진 기술의 발전 때문에, 작품의 좋고 나쁨보다는 나의 개인적 좋고 싫음만이 존재한다. 따라서 갤러리스트나 컬렉터 입장에서 작품을 고르기가 무척 어려워진 것 같다.​

뉴욕의 가고시안이나 런던의 화이트큐브 같은 세계적인 화랑, 크리스티나 소더비 같은 대형 옥션 회사, 아트 바젤, 프리즈, 피악 같은 세계적인 아트 페어에서 거래되는 작품들은 진정으로 예술성이 뛰어난 것일까? 어떤 작품의 예술성의 있고 없음을 과연 누가 논리적으로 타당하게 증명할 수 있을까?

​ 현재 한국의 미술시장은 방향성을 잃어버린지 오래되었다. 메이저 갤러리들이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니, 마이너 갤러리들도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잃어버렸다. 자본력이 없는 작은 갤러리들이 미술시장을 견인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작가의 브랜드를 만드는 방법 중에 하나는 작품 거래량의 증대이기 때문이다. 세계 미술은 이미 예술의 순수성은 사라지고, 자본력에 의해서 좌우되는 시장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얼마 전 서울시립미술관 관장님과 저녁을 먹었다. 미술관에서 한국미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노력했으면 한다는 멘트를 했다. 소외받는 분야인 설치미술 작품 구입도 좋지만, 한국미술사에 남을 만한 순수 한국화의 작품 구입에 일정 예산을 배당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드렸다. 한국미술의 정체성 문제가 늘 머리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인 듯하다.​

왜 한국 화가들은 우리 소재를 우리 식으로 그리려는 생각을 안 하거나 외면하면서, 서양풍으로만 그리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서양화 기법의 무조건적인 도입을 개탄했던 박수근 화백의 이 말이 지금의 미술계에도 메아리로 울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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