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끝, 풍경 그리고 이준호
칼끝, 풍경 그리고 이준호
  • 김재현
  • 승인 2019.03.27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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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포=김재현 기자] 화가 이준호의 작업은 마치 수묵을 현대에 재현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작품을 위해 태고의 지층을 쌓듯 캔버스에 검정색, 붉은색, 노란색 등 다양한 색을 칠해서 덮여지면서 이루어진 밑 작업이 끝난 공간, 화면은 날카로운 칼날 끝을 사용해 생각이 이끄는 대로 긁기의 시작점을 정하지 않은 채 여기 저기 빈 공간은 드로잉으로 형상화 시킨 작품을 1월20일부터 31일까지 인사동 영아트 갤러리에서 선을 보인다.

이준호, '호반에서'. 162 x 130.3cm, Scratch on canvas, 2008.
이준호, '호반에서'. 162 x 130.3cm, Scratch on canvas, 2008.

그는 “긁혀진 선들은 태고의 신비를 벗고 작업 초반의 엉성한 형태에서 점차로 산의 형태와 호수, 폭포, 계곡의 윤곽이 뚜렷해진다며, 마치 땅 속에 묻힌 유물을 발견한 후 아주 조심 스레 흙을 걷어내는 작업과 같다” 라며 세밀함을 강조한다.

그의 손에 잡힌 칼날 끝은 풍경의 윤곽이 드러남에 따라 닳고 무뎌진다. 뭉뚝해진 커터 칼날의 끝자락은 잘라내면 다시금 시퍼렇게 날이 선 생성의 도구로 변신을 하게 된다.

칼날의 반복적인 행위로 그는 관념 속 풍경을 서서히 구체적 형상으로 구체화 시키고 있다. 칼날로 긁혀진 공간은 전통 산수의 구도에서 벗어나 사각의 틀 안 화면을 가득 채운 네모의 산수로 변신을 이루며 긁혀져 만들어진 공간 안의 풍경과 그렇지 않은 여백은 분명한 경계의 대조를 확연히 보여준다.

이준호, '심산유곡'. 210 x 210cm,Scratch on canvas, 2008.
이준호, '심산유곡'. 210 x 210cm,Scratch on canvas, 2008.

*현실의 풍경,혹은 관념의 풍경*

작가 이준호가 긁어내어 만들어 놓은 화면에는 색이 떨어져 나간 하얀 공간과 사이 사이 촘촘이 남겨진 선들로 자신의 사유의 공간 안에 한 폭의 산수경을 만들어 내게 된다.

근경에는 긴 선들과 짧은 선들이 서로 얽힌 조형요소만이 강조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원경으로 화면을 바라보면 산, 바위, 물 등의 거대한 풍경이 생성되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첩첩이 쌓인 선들은 숲을 만들며, 바위산들이 우뚝 솟고 비스듬이 기울기도 한다. 서로 부딪혀 떨어져 나간 파편들은 협곡을 만들고, 물의 흐름을 조절하기도 하는 장면을 연출하게 된다.

여기에 드러나는 대상들은 현실의 풍경이자 작가 개인의 관념의 풍경이 되게 되는 것이다. ‘안견은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고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기괴한 산과 바위를 그려내고, 오른쪽으로부터 왼쪽으로 이야기를 전개 시키는 전통적인 방법을 따르지 않는다.

이준호, '산수경'. 53.0 x 45.5cm,Scratch on canvas, 2009.
이준호, '산수경'. 53.0 x 45.5cm,Scratch on canvas, 2009.

좌에서 우로의 이야기 전개 방식을 쓰며, 현세와 내세의 경계를 화면 중앙에 큰 협곡의 물줄기와 몽유도원을 바라보는 눈높이의 차이를 둔 것과 같이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탄생 시킨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는 사물을 꿰뚫어 보는 작가의 직관이 뛰어나야 가능 한 작업으로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이준호는 자신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이나 기법, 그리고 재료를 통해 시대는 다르지만 빈 화면을 바라보며 직관에 의해 관념의 산수 풍경을 만들어 가는 과정은 안견의 독창성과 유사하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현대와 전통이 혼재 된 아이러니, 해학과 픽션의 공존을 그리다*

그의 작품 안에 산은 광야 처럼 넓고 밀림과도 같아 그 숲의 길이 조차 가늠 할 수 없을 만큼 펼쳐지고 있다. 그곳엔 달이 있고 풍경도 있다. 달은 호수를 비추고,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는 달을 삼켜버린다.

또한, 높은 하늘에 목적지를 향해 날아가는 여객기도 등장한다. 우스꽝스러운 호랑이가 그것을 바라본다. 마치 과거 속에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을 하는 듯한 설정을 보여주게 된다.

그는 “현대 사회의 중심은 아이러니 같아요, 상황이 전혀 다른 두 공간을 현대와 전통으로 묶어 형상화 하고 싶었다” 며 “화면을 전개하는 이야기의 골자는 해학과 픽션으로 채워냈다” 고 이야기 했다. 마치 전통의 시계와 현대의 시계를 한 곳에 집중 시켜 묶으려 한 그의 의도가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사각의 공간에서 날카로운 칼끝은 또 다시 태고의 지층을 발굴한다. 지금 여기 태고의 지층만 존재할 뿐 나와 화면을 대하는 장소는 시간이 정지된 채 현실과 사유의 경계 사이에 있다.

이준호, '산수경'. 90.9 x 72.7cm, Scratch on canvas, 2009.
이준호, '산수경'. 90.9 x 72.7cm, Scratch on canvas, 2009.

엄지와 검지로 칼집을 거머쥔 상태에서 힘의 완급을 조절하며 화면을 긁어내고 칼집을 받친 중지는 긁어내는 반복의 노동으로 굳은살이 쌓여 손마디의 미세한 감각은 어느새 무뎌져 있다.

거대한 산의 기운을 휘감고 어머니 품처럼 들어앉은 마을 시미리! 관념의 세계에 빠져 설화를 만들어 낼 즈음, 작업실 바깥 풍경은 시나브로 밤으로 향하며 침묵의 세계로 접어든다. 육안으로 뚜렷이 식별되던 모든 사물들은 어둠 속에서 달빛에 의지해 자신들의 존재를 희미하게 드러낸다. 주변은 적막하고 고요하다.

“ 이제 나는 잠든 생명의 숲이 깨어날 시간을 기다리며 칼끝 풍경에 서있다.”

작가 이준호는 목원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 후 동대학원 산업정보대학원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 했다. 2006년 관훈갤러리의 개인전 이후 용인 문예회관,가나아트 스페이스,영아트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전개했고, 2008년 경기문화재단 문예기금과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에 선정됐다. 또한 2009년에는 한중국제미술교류전과 서울아트살롱 등의 아트페어에 참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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