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대표화랑 ①한국 미술의 살아있는 역사, 선화랑 그리고 김창실 회장
우리시대 대표화랑 ①한국 미술의 살아있는 역사, 선화랑 그리고 김창실 회장
  • 김재현
  • 승인 2019.03.27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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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미술계를 이야기 하면서 우리는 늘 상 화가들을 우선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미술의 대표적인 작품에 대한 가장 중요한 창작 활동을 하는 미술인 특히 작가들을 이야기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선화랑30주년기념전 남관, 유영국 작품앞에서 고 김창실 대표'.(사진=선화랑)
'선화랑30주년기념전 남관, 유영국 작품앞에서 고 김창실 대표'.(사진=선화랑)

그러나 미술을 세상에 알리고, 그들의 예술 혼을 온전히 완성 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곳이 화랑일 것이다. 그들이 없는 미술계를 상상이라도 해 본적이 있을까?

이제는 공기와 같은 역할로 없어서는 안될 존재이기에 너무나도 그들의 행적에 대해 무게 감을 가지지 않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나라 미술계를 굳건히 이끌어 온 대표 화랑의 발 자취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본지에서 열거하는 대표화랑의 순서는 각 화랑의 실적과 설립 시점과는 무관함을 밝힌다.

한국 미술의 살아있는 역사, 선화랑 김창실 회장’

한국의 현대미술을 조망하는 대표적인 화랑들 가운데 전시 공간이 밀집해 있는 대표적인 지역인 인사동에 자리를 잡고 시작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짧지 않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인사동과 한국 미술을 지켜본 선화랑의 김창실(1935~2011) 회장이 있다.

대한민국 문화 메카 1번지라고 평을 받고 있는 인사동이 현재의 모습으로 자리 매김을 한 것은 30여년 전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70년대 중반까지 인사동은 고서점이나 고미술상의 거리로 알려져 왔다.

이러한 지역에 1970년 박명자가 개관한 ‘현대화랑’을 시작으로 1974년 ’문헌화랑’ 1976년 ‘경미화랑’이 문을 열면서 미술의 거리로 새롭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당시 개관한 이후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화랑들은 이호재의 ‘가나화랑’, 박주환의 ‘동산방’ 등이 있고 이 가운데 1977년 개관한 ‘선화랑’도 70년대 우리 시대 대표 화랑으로 시작한 출발선에 같이 있었다.

'옛 선화랑 외관'.(사진=선화랑)
'옛 선화랑 외관'.(사진=선화랑)

수 십년의 세월 동안 많은 화랑들이 명멸한 가운데 선화랑의 김창실 회장은 늘 한 자리에 머물면서 격동의 시절 미술인과 그들의 모습을 지켜본 대표적인 화랑인으로 자신만의 길을 굳건히 걸어왔던 것이다. 그의 행보는 수 년 전 모 미술지 와의 인터뷰 당시 육성에도 담겨져 있었다.

"예술은 길고 인생을 짧다는 예기도 맞아요, 그런데 저는 ‘예술은 인생의 오아시스다’ 이렇게 생각해요, 그림을 대하면 지금도 마음이 흥분이 되거든요, 오랫동안 화랑에서 일 할 수 있는 것도 다 그림 때문이에요.”

1977년 고 김창실 회장이 ‘선화랑’을 오픈 한  이후 2003년 ‘선아트센터’가 신축 개관됐다. 국내외적으로 경제적 어려움이 큰 가운데 미술계의 처지도 별 다를 바 없는 상태에서 5층 규모의 대규모 전시관을 신축하며 “문화사업이 이윤 추구보다는 사람들의 마음을 윤택하게 만들어 주는 일이에요, 장사에 앞서면 오래 할 수가 없습니다” 라며 “ 어려운 시기에 작가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라고 증축의 이유를 설명하기도 했다. 같은 장소에서 30여년의 시간을 지켜온 ‘선화랑’은 지금까지 수백회의 전시를 진행했다.

#살아 있는 문화예술의 영원한 동반자#

선화랑은 1977년 서울 종로구 인사동 184번지 현재 위치에서 개관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까지 선화랑은 회화, 조각, 판화,사진,공예 분야에 걸쳐 작고 작가, 원로작가, 중진작가, 신진작가,외국작가 등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을 엄선하여 전시를 개최해 오면서 한국 현대미술의 성장과 발전을 견인해온 명문화랑으로 공인 받고있다.

특히, 샤갈, 부르델,매그넘,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랄프 깁슨 등 외국의 거장 작품들 외에도 많은 현대미술의 현역 작가 작품들을 국내에 소개하는 데 있어서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왔다.

또한 외국의 유수한 아트페어에도 30회 이상 참여해 한국의 현대 미술을 전파 보급하는 데 일익을 담당해 왔으며, 1980년대부터 국제 교류에도 선두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선화랑이 발행한 미술 전문지 선화랑'.(사진=선화랑)
'선화랑이 발행한 미술 전문지 선미술'.(사진=선화랑)

한편, 선화랑은 1979년부터 1992년 까지 13년간 미술문화 저변 확대 및 보급을 위해 계간 미술지 ‘選 미술’ 을 발행해 미술발전에 공헌 했으며 1984년 부터는 ‘선미술상’을 제정해 한국화,서양화, 조각 등 세 분야의 만 35세에서 만 45세 까지의 작가를 대상으로 현재 21명의 우수한 수상 작가를 배출했고, 그 작가들이 현재 한국 미술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것에 보람을 갖고 있다.

2005년 10월 종로구 소격동에 새롭게 개관한 갤러리 선 컨템포러리는 30년 동안 예술에 대한 고집스러운 애정으로 한국 미술 현장의 살아있는 역사를 이루어온 인사동 선화랑을 모체로 하고 있다. 갤러리 선 컨템포러리(대표 이명진)는 한국으로부터의 미술관 세계로부터의 미술이라는 과제를 동시에 수행하기 위해 독창적인 한국 작가들을 세계에 알리고 한국 미술계에 자극과 격려가 될 세계 작가들의 작품을 국내세 소개하기 위하여 탄생이 됐다.

*작가와 화랑간의 조율이 필요한 정당한 거래 관계의 재정립*

선화랑 고 김창실 회장은 자신이 1977년 화랑 개관 당시 한 에피소드를 말했다. “당시 겸재의 작품을 사고 싶어서 손에 끼고 있던 다이아 반지를 팔아서 산 기억이 있어요” 라며 자신이 미술품과의 인연에 대해 말을 꺼냈다.

“당시 고미술품 하는 사람에게 건물 세를 낸 상태였는데, 월세를 내지 않아 직접 개원을 하게 되었지요, 처음에는 그 동안 민화나 목기 등을 컬렉션하여 모아둔 작품들을 가지고 선화랑을 개관하게 된 것이라며” 그 과정에서  자녀들과 남편의 성원이 가장 큰 힘이 되었다고 술회 하였다.

당시 김창실 회장이 가지고 있는 화랑 운영에 원칙은 확고 하다. 작가의 입장을 이해하고 많이는 도와주지 못하지만 상호간의 신뢰와 후원을 반듯이 해야 하는 것이 화랑 경영장의 필수 덕목이라고 한다.

여기에 다른 화랑이 어렵게 발굴한 작가에 대한 상 관례를 반듯이 지켜야 된다고 말한다. 이는 그 동안 수많은 작가들을 발굴하고 나면 다른 화랑에서 돈을 가지고 그들을 뺏어가는 관행에 대한 일침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1980년 5월 선미술 창간 1주년 기념식 모습'.(사진=선화랑)
'1980년 5월 선미술 창간 1주년 기념식 모습'.(사진=선화랑)

“화가들에게 지원을 하고 전시를 시켜 주고 나면 배반감을 많이 느꼈어요, 특히 자신이 발굴한 작가를 다른 화랑이 돈의 많고 적음으로 몰래 데리고 가는 것을 볼 때는 정말로 이 일을 해야 되는 지에 대한 회의도 느꼈다” 고 하는 김회장은 그래도, 인상의 남는 작가들 중에 신인을 발굴해 미술계에 등단 시키는 것이 화랑 본연의 숙명이라 생각한다고 한다.

“유명한 작가의 작품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실력 있는 작가들을 발굴하여 세상에 보여줘야지” 남의 화랑이 힘들여 발굴해 키워낸 작가를 뺏어가는 것은 노력하지 않고 공짜로 얻으려는 심성이라며, 화랑과 작가들이 기본적인 도리와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자신은 한 결 같은 길을 걸어가려 한다고 말 한다.

“화랑은 문화 예술품을 다루는 공간 이에요, 또한 예술가들은 순수합니다. 그래서 도와주고 후원해 주어야 한다” 며 “ 자신은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도와 주는 삶을 살아온 것 같다”고 세간의 화랑 경영자들이 우습게 장사치로 비추어지는 일각의 시선에 대해 자성하고 개선을 하여야 한다고 한다.

김 회장은 문화예술계에서 화랑을 운영하는 것 자체를 자신의 숙명처럼 여기고 미술계를 살아가야 한다고 역설 한다. 신이 만들어준 재능을 가진 작가들을 화랑 운영자들이 활성화 시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인식을 화랑 경영자들이 갖추어야 한다며, 인간의 기본적인 자세를 배양하며 활동하는 것이 미술을 발전시키는 본질이라고 이야기 한다.

#건전한 미술시장 질서 및 풍토 정착에 앞장#

김창실 회장은 1977년부터 설립한 전문 기획 화랑인 선화랑을 운영해 오면서 정도 경영을 목표로 하여 건전한 미술시장 질서를 바로 잡는 데 적지않은 역할을 수행해 오고 있다.

1997년 외환 위기 시에 많은 화랑들이 폐업하거나 작품을 함부로 투매하는 등의 상황에서도 작가 보호를 위해 갖은 노력을 하였으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더 많은 전시 횟수를 늘려 미술 시장이 대중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계기를 만들었던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해왔다.

또한 우리 미술계에서 가짜 작품 사건이라 여러 가지 법안 관련 시국 때도 항상 미술계가 대중들의 신뢰를 받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는 신념으로 자신의 사업체 경영마저도 희생시키며 이해 당사자들을 설득하고 거중 조정하는 일에 앞장섬으로써 미술계의 어른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온 점은 지금까지 칭송 되고 있다.

'운보 김기창 작업실에서 고 김창실 회장'.(사진=선화랑)
'운보 김기창 작업실에서 고 김창실 회장'.(사진=선화랑)

*출판 및 저술활동을 통한 미술문화 전도사 역할 자처*

선화랑 김창실 회장은 남다른 문화 의식을 가지고 1979년부터 1992년 까지 14년 동안 미술지 ‘選美術’을 발행해 왔다. 전문지 출판이야말로 이론가들에게 연구 발표의 장이 되며, 일반인이나 작가들에게는 계몽과 교양 및 정보의 장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년간 적자가 적이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문화로 번 것은 문화로 환원해야 한다는 신념을 굽히지 안고 화랑 경영인으로서 오랜 기간 전문지 발행에 힘을 쏟아왔다. 바로 그것이 80년 군부 시절 당시에도 발행이 된 ‘선미술’이다.

출판과 함께 김창실 회장은 탁월한 문장력을 가진 문화 칼럼니스트로서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미술계에 몸담은 이후, 지금까지 일간지, 잡지 등을 통해 수 많은 칼럼을 연재해 미술문화 정책, 제도개혁, 문화 교양 등의 측면에서 미술계 입장과 논리를 전파하는데 앞장 선 것으로 평을 받게 된다. 이와 함께 일반인들이 쉽게 미술을 이해하고 애호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는 글을 저술해 왔다.

특히 1996년에는 저서 ‘달도 따고 해도 따리라’(김영사 출간)를 저술해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문화사업가로서, 사회지도자로서, 미술 현장의 일선에 있는 화랑 경영자로서 몸소 겪은 체험과 사색을 섬세하고도 감각이 넘치는 문장으로 기술해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 감동은 물론 미술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미술 문화계 지도자 역할, 화랑경영인 최초 옥관 문화 훈장 수여*

김 회장은 1977년 선화랑 개관 이래 한국화랑협회 회장에 두 차례(1985~87년, 1990~93년) 재임하는 동안 탁월한 지도적 역할을 수행해 미술계의 질적 발전에 기여한 바가 큰 것으로 대 내외적으로 알려져 있다.

첫 번째 회장 재임 중 1986년부터 화랑협회가 주관하는 ‘화랑 미술제’를 처음 제정 및 개최 전국적으로 크게 확장 시키며 현재까지 미술대중화의 기틀을 다지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옥관문화훈장 수여식 모습'.(사진=선화랑)
'옥관문화훈장 수여식 모습'.(사진=선화랑)

현재까지도 화랑협회의 원로로 고문인 역할을 맡아오면서 미술계가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성실히 지도력을 발휘함으로써 미술계의 위상을 높이는 데 합리적이고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아온 것은 미술계의 살아있는 전설처럼 김회장이 걸어온 한 길을 확인하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국립현대미술관 자문위원(1991~93년), 문화체육부 산업미술개발위원회 자문위원(1993~94년), 예술의 전당 후원회 발기인 및 이사, 세종문화회관 후원회 부회장(미술계 대표) 등을 역임하는 동안 우리 미술계의 질적 발전과 신뢰도를 높이는데 일익을 담당했으며 미술계의 지도적 위치에서 물심양면으로 헌신과 기여를 해왔다. 그러한 행적의 공과일까 지난 2009년 문화의 날 10월17일 날 화랑 경영인으로는 최초로 옥관문화훈장을 수여 받았다

*지나온 30년 미래로의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선화랑*

지나온 33년 이제는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선화랑은 내일의 한국 미술을 위해 크지 않지만 옹골찬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미술은 지속적으로 발전을 합니다. 꾸준히 다양하게 공부를 하여야 하며, 세계 시장의 흐름을 확인하며 느낌을 살려야 해요, 적극적으로 변화를 위해 최근에는 젊은 작가들에 대한 공부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며 화랑 경영인은 모든 장르와 나이를 포괄해 섭외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데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지난 1984년 선미술상을 만들어 35세~45세 미만 신예 작가들에게 수상과 전시의 기회를 만들고 있는 선화랑은 이들은 우리 미술의 내일을 책임 질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35~45세 가 된 작가들은 자신의 작업 세계가 일정 부분 안정이 된 상태이기에 수상자들의 면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고 작품성도 좋아지는 계기를 볼 때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선화랑이 다른 화랑과 달리 유독 조각 분야의 전시가 집중된 것에 대하여 김 회장은 “화랑들이 조각을 기피하고 있어요, 판매가 어렵다고, 그렇지만 나는 꾸준히 조각 분야에 많은 부분을 할애 하려 합니다. 종합예술인 조각을 화랑들이 키우고 널리 확산을 시켜야 됩니다” 라며 굳이 자신이 돈을 쫓지 않는 연유와 상통하는 주장을 했다.

예술과 함께 한 반 평생, 이제는 많은 이들과 나누는 게 행복이라며 젊은이들과 공예 분야에 대한 지원을 하려고 새로운 포부를 밝히는 김창실 회장, 새롭게 뻗어 나아갈 작가들과 원로들 중에서도 어려운 작가들에게 전시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이 본인의 일관된 소망이라며 개관 33주년이 되는 4월경 330인 전을 기획 중이라 귀띰했다.

'선화랑 30주년기념전 도상봉, 김형근작품 앞에서 김창실 대표'.(사진=선화랑)
'선화랑 30주년기념전 도상봉, 김형근 작품 앞에서 김창실 대표'.(사진=선화랑)

지난 20주년 당시 1호 작품 200점을 건 전시 이후 13년이 지난 현재의 발전된 작품의 경향과 새로운 작가들의 미래를 가늠해보는 큰 마당을 마련 중이라는 것이다.

“화랑에 대한 신뢰도와 기여도에 따라 나라로부터 훈장 까지 받았어요, 이제는 내가 걸어온 길에 대한 평가를 바람직한 유통질서의 확립과 문화가 세상에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는 시기를 준비하고 완성 시킨 이후에 받고 싶다"고 말했다.

또한 "화랑이 가진 숙명인 작가의 발굴과 육성이라는 본질적 업무에 매진하려 합니다"라며 예술에 대한 정열과 진취적인 가치관으로 미술을 사랑하는 여러분들의 능동적인 소통의 장을 이루고자 노력하는 선화랑과 갤러리 선컨템포러리에 여러분의 많은 성원을 부탁 드린다며 지나온 시간에 대한 짧은 이야기를 정리했다. [2009년 인터뷰...글=왕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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