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승, 내면의 사유를 통한 동양적 세계관의 표현
구자승, 내면의 사유를 통한 동양적 세계관의 표현
  • 아트인포(artinfo)
  • 승인 2017.11.26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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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포=진오성 기자] 구자승은 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자연주의 작가로 입지를 확실히 굳힌 그는 우리 구상미 술 화단에서 탄탄한 구성력과 밀도 깊은 묘사력을 인정 받은 정상급 작가라 할 수 있다.

'구자승 작가'.
'구자승 작가'.

그리고 이제 중진작가로서 선두에 기명 되는 것은 오랜 화력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부단한 실험과 연마를 통해 구상미술의 심도와 격조를 높인 작업적 성과가 더 크기 때문이다.

대상이 지니고 있는 형상과 색감을 리얼하게 묘사해내면서도 배경의 구성과 배열, 그리고 배면의 색감을 통하여 감성적 서정과 예기의 맛을 은근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작가의 장기라 할 수 있다.

물 흐르듯한 자연스런 필치와 탄탄한 응집력의 구성과 살아있는 듯한 생명력의 색감이 어우러진 그의 화면은 오늘의 구상미술이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해준다고 하겠다.

그림을 그리는 작업은 새로운 꿈을 꾸는 것이다. 거기 사물(being)이 그 적절한 자리에서 하나의 필수 불가결한 아름다운 대상이 된다는 것, 그 대상들 하나하나가 작가의 분신이 되고, 자신의 잃어버린 꿈의 파편이 된다.

작가는 어느날 쓸모 없이 버려진 그 나무 상자에 술을 채우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술병은 비워져 있다. 물기어린 자갈들을 하얀 보자기에 싸 말려주고 싶어한다.

구자승, 'Ifor의 갈망'. 250x140cm, 2008.
구자승, 'Ifor의 갈망'. 250x140cm, 2008.

담겨져야 온전해지는 것들, 담아야 그릇이 되고, 이름이 되고, 존재가 되는 것들, 그런 떠도는 일상의 사물들에 새로운 이름을 주고, 더 아름답게 자리 매김 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어한다. 그들 각자는 이미 생명을 상실했지만, 하나의 그림이라는 공간에 놓여짐으로 시적 오브제의 재탄생을 본다. 

예술은 우리의 삶처럼 깊이 들어 갈수록 넓어 지는 것 이라고 말하듯, 나이와 함께 비로소 자신의 삶을 보게 되고,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게 되는 것일 것이다.

작가 자신의 그림의 표정을 통해, 순간 지나가는 바람 마저도 숨을 죽여야 하는 그런 초긴장의 상태에 도달하여, 자신의 시각이 미세한 색채와 형태에 신경이 곤두설 때 작가의 삶도 오브제들 속에 되살아 난다.

구자승, '사각탁자의 정물'. 72x72cm, 2008.
구자승, '사각탁자의 정물'. 72x72cm, 2008.

새로운 조화와 질서 위에 탄생하는 미세한 호흡

숨을 쉬는 그림, 그 대상들이 주는 더 미세한 호흡을 찾고 싶어하는 작가 구자승은 마치 그려놓은 대상이 무생물체의 큰 덩어리가 아닌, 무수한 꿈의 파편들이 부서져 그 잔해의 흔적을 극복하고, 온전한 오브제가 되기까지 염원한다. 상처 투성이의 아픈 심장을 가진 그 정물들을 작가는 그림 속에서 치유한다.

가장 깨긋하고 , 온전한 것으로 표현되어 새로운 힘을 잉태하고 , 다시 하나의 커다란 힘에 응집되는 새로운 조화와 질서 위에 놓여지길 원한다.  사물의 분명하고 명확한 묘사, 단지 외광의 투영만이 진실이 아닌 것처럼, 작가의  그림 앞에서 어느 감상자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실수로 흘린 한오라기 실밥 조차도 보이지 않는 , 마치 원시의 때묻지 않은 순수 결정체, 어쩌면 에덴의 향기로운 사과를 보는 것 같다고 한다. 그것이 결코 거칠거나 투박하기 보다는 정제된 세련미와 나름의 멋이 담겨 있어 맑아 진다고 한다. 그렇다, 극도의 정적 속에 투명하게 빛을 머금는 사물, 존재의 오브제들은 자유로운 유기체가 되어 그 감상자와 대화를 낳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구자승, '테이불위의 정물'. 116,7x72.7cm, 2008.
구자승, '테이불위의 정물'. 116,7x72.7cm, 2008.

“사물이 거기 그 자리에 있다”. 작가 스스로도 개입하길 원치 않는 단지 거기 그 자리에 그들을 놓여주는 일을 할 뿐이다. 그래서 굳이 작가가 그들을 통해 뭔가 말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 이 리얼리티의 벼랑 끝에서 그것들은 이미 현실의 being이 아닌 것이다. 제2의 being 이 작품 속에서 잉태하는 것이다. 작가 자신은 이제 붓을 내려놓은 낯선 이방인일 뿐이다.

이렇게 하나의 오브제에 빠져 들면 우리는 미지의 공간과 마주할 수 있게 된다. 결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것들의 낯선 배합,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오브제들의 독특한 자아, 작가도 그 대상들 앞에서 새로운 존재로 타오르는 촛불로 그렇게 꿈틀 대며  숨을 쉬고 싶어 한다.

구자승, '누드'. 33.3x19cm, 2008.
구자승, '누드'. 33.3x19cm, 2008.

영원한 공간 속에 표현하는 사실의 세계

작가 구자승은 정물 하나하나에 호흡이 있어 각자의 소리를 말하려는 그 emeringence의 상태, ‘긴박하다’,’외롭다’,그리고 ‘강렬하다’. 정적과도 같은 공간은 그들이 자유로울 수 있는 우주이다. 그 공간은 진공의 상태이며 무한하다. 그러나 그 안에 표현되는 오브제들에는 시간이 개입한다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마치 사물이 태양빛에 따스이 온기를 덧입고 바래가듯 시간성에 구속 받는 것은 오브제들 뿐이라고 …

영원한 공간 속에 그 유한의 오브제들, 그것들은 살아 숨쉬는 동안만은 최고의 빛을 발하고 가장 아름다워야 한다. 바로 그때서야 비로서 어느 평론가가 그의 작품을 두고 이야기한 “시적 존재의 현현”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하나 하나의 작품 제작을 위한 진지함과 열정, 그리고 절제된 감정 표현으로 작품이 자신들의 자리 매김과 저마다의 색깔로 빛을 발할 때 쯤이면 작가는 가끔 호흡을 멈춘다. 그것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그들이 호흡을 하기 때문인 것이다.

하나의 힘 안에 응집된 그들만의 질서, 거기 그 자리에 있어 흔들리지 않는 조화의 아름다움, 사물들 각자가 자존심을 회복 하고, 어느날 아침 자신이 눈을 떳 을 때 그 미지의 공간에 그것들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때문이기에 그가 작품 앞에서 호흡을 멈추고 그들을 관조 하는 것이다. 

구자승, '꽃과 자두'. 72x72cm, 2008.
구자승, '꽃과 자두'. 72x72cm, 2008.

새로운 자아의 탄생, 허물을 벗는 새로운 잉태, 벌거벗은 나신의 미지의 순수한 유혹, 그 낯선 시선 속에서 우리를 자각하게 하고 느끼고 체험하게 한다.

마치 우리가 지나치기 쉬운 사실 안에서 가장 바른 사실의 긍정, 결코 억압 하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는 자기 망각의 공간, 결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참 긍정의 꿈의 영역 , 이것들이 바로 작가 구자승이 표현하는 “사실”의 세계 이다.

정태적이고 관조적 이미지의 지향

그가 추구하는 공간의 해석은 동양화의 여백 개념에 근거하고 있는데, 열린 공간을 상정한다는 뜻이다. 동양화에서의 여백은 ‘비어있다’는 서양적인 공간 개념과는 근본적으로 상이하다.

형태에 대응하는 상대적 개념으로서의 ‘비어두는’ 공간인 것이다. ‘비어 있음’은 수동적인 태도를 의미 하는 반면에’비어둠’은 능동적인 태도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동양화의 여백의 개념은 비표현적인 공간이라고 말 할 수 는 없다.

여백 그 자체도 표현의 하나인 까닭이기 때문이다. 작가 구자승과 같이 순수미를 추구하는 작가에게는 미학적인 관점을 더욱 중요시 하는 것이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만, 어떤 식으로든지 현실 감각에 일치 될 수 있는 표현 방식을 찾아 낸다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그것이 세상을 직관하는 예술가로서의 현실 인식의 한 표출 일 수 있는 까닭이다. 

전형적인 사실주의 작가로서 이지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작가는 외부 세계를 향한 차가운 시선으로 물상의 외적인 형태미를 훑어 가면서  자신의 미학적인 관점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 절정에 이른 손의 솜씨에 비례하는 정확한 눈 및 색채 감각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요소가 사실주의 작가에게는 필수적이다.

구자승, '램프있는정물'. 60x60cm, 2008.
구자승, '램프있는정물'. 60x60cm, 2008.

그는 정물화와 인물화 및 누드화 그리고 풍경화에서 그만의 독특한 색깔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 색깔은 그만의 정서 및 조형적인 특징을 의미한다. 어느 장르 이든 간에 고요한 정적인 분위기로 물들어 있는 점도 하나의 특징이다.

어느 면에서 감정의 절제 및 겸양을 미덕으로 여기는 유교적인 정서에 일치한다고도 할 수 있는데 이는 그 자신의 세계관에서 비롯된 결과일 것이다. 자신을 드러내기 보다는 한발 물러서는 입장을 취하는 그의 성품과도 무관치 않은 것이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동양인의 공통적인 특성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그는 동양적인 정서를 그림 속에 실현 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 구자승은 정물이나 인물이나 항시 정태적이고 관조적인 이미지를 지향한다. 간단히 눈으로 이해되는 그런 외적 형태미에 주력하는 그림의 영역에서 한발 뒤로 물러나 인간의 내적인 세계를 반영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사유가 깃들인 그림이 아니고는 싱겁다는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는 뜻이다. 자연 연령 환갑이면 세상에 대한 이해 방식에서 물리가 튼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풍부한 경험 및 지식이 뒷받침되는 시점이다. 이제 그는 그러한 시간대로 성큼 들어서고 있다. 그림 여러 곳에서 이미 그러한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농염한 미를 즐기는 시간과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구자승, '정물'.  72x72cm, 2006.
구자승, '정물'. 72x72cm, 2006.

작가 구자승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Ontrio College of Art를 졸업했다. 개인전 14회와 부부전 7회를 통한 자신의 작업을 선 보이고 있으며, 세계현대 Realism 회화전(동경 미스고시 백화점 미술관)외 350회 초대전 출품과 Tokyo,Miami,Moscow,New york Art fair 와 북경 비엔날레에서 탁월한 작품성을 인정 받았다.

몬테칼로 국제현대미술제 조형예술상 수상 , Salon Violet 은상 수상 , 세계평화교육자상 수상 , 미술문화상 수상(예총) , 오지호 미술상 수상 , 옥조근정 훈장을 수여 받았으며, 한국미술대전 심사위원, 6.8회 회장, 한국인물작가회회장, 서울특별시 문화상 수상 후보  심사위원,광주 광역시 미술대전 심사위원,한국예총,상명대학교 교수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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