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회화의 거장-페르난도 보테로
라틴회화의 거장-페르난도 보테로
  • 진오성
  • 승인 2017.11.30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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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포=진오성 기자] 20세기 중반 이후 꾸준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페르난도 보테로(Fernando Botero)는 풍만한 인체로 잘 알려진 작가이다.

보테로, '춤추는 사람들'. oil on canvas,185x122cm,2000.(사진=국립현대미술관)
보테로, '춤추는 사람들'. oil on canvas,185x122cm,2000.(사진=국립현대미술관)

1932년 콜럼비아 북서부 안티오키아주(Antioquia)메데인 에서 태어난 그는 인체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감성을 환기 시킴으로써 이 시대의 살아있는 거장의 한 사람으로 인정 받고 있다.

비 정상적인 형태감과 화려한 색채로 인해 그의 화풍은 유치하게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천태만상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그의 조형관은 중남미 지역의 정치, 사회, 종교적인 문제가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사실주의 경향도 엿 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지난 2008년 라틴아메리카 거장전을 통해 한국 관람객들에게 라틴 아메리카 특유의 조형성과 색채를 선보인 이후 독자적인 경향을 구축하여 새로운 감각을 더하여 온 그들의 미술을 보테로의  1980년대 이후 최근 까지의 작업을 통해 시대를 관통하는 보테로의 주된 조형관을 살펴볼 시간으로 다가온다.

인체의 양감에 대한 새로운 발견

보테로의 화풍은 명암과 원근법을 단순화하며 현란한 원색을 사용해 대상의 풍만한 형태감을 강조하도록 화면을 구조적으로 구성 했다. 그가 추구했던 과장된 양감 표현은 대상의 사실적 재현이라기보다는 객관적이면서 관념적인 형태를 추구한 결과로 받아들여진다.

보테로, '루벤스와 아내'. oil on canvas, 205x173cm, 2005.(사진=국립현대미술관)
보테로, '루벤스와 아내'. oil on canvas, 205x173cm, 2005.(사진=국립현대미술관)

이러한 양감의 표현은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형태를 추구한 입체파 이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20세기 이후 여성의 미에 대한 기준이 달라지면서 마른 몸에 대한 선호도가 증가하고 풍만한 신체 형태는 호감도가 줄어들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보테로의 풍만한 인체는 여성의 신체에 대한 사회적인 통념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권위나 위엄을 지니고 있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의 실제 신장보다 과대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보테로의 작품은 실제로 어떤 사람을 신체적으로 크게 느끼게 하는 논리에 대해서 조롱하고 있다.

1957년 보테로가 미국 활동 당시 국제미술계는 추상표현주의가 유행을 하던 시기였다. 무의식과 의식, 그리고 영감에 기반을 둔 추상 표현주의의 양식적 특징은 형체가 해체되고, 붓질의 우연한 효과가 강조 됐다. 이러한 추상표현주의와는 달리 그의 작품은 확고한 형태감을 추구하였던 점에서 확연하게 차이가 드러났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류지연 학예연구사는 "보테로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영감을 받은 주제와 더불어 확고한 형태감과 충실한 묘사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조형 세계를 구축했다" 고 설명했다.

보테로, '자화상'. oil on canvas, 193x190cm, 1992.(사진=국립현대미술관)
보테로, '자화상'. oil on canvas, 193x190cm, 1992.(사진=국립현대미술관)

그의 인간은 화면에 종속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공간 속에서 확장하여 공간 자체를 확장하는 자율적인 존재로서 보테로의 인간은 스스로의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하여 공간과 끊임없이 조응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현실과 자신만의 우화, 그리고 복잡한 상상의 세계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작품이 비록 슬프고 우울한 주제더라도 다른 차원으로 승화될 수 있는 내적으로 견고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바로 진실의 힘이라고 이야기 한다.

이로 인해 보테로는 고전과 현대, 유럽과 신세계, 개방과 폐쇄, 기쁨과 슬픔의 경계에 흔들림 없이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는 신념의 세계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즐거움을 너머 관객들의 인식의 변화 추구, 형상의 팽창를 통한 권력의 객관화 회상

이번 보테로전에는  1950년대부터 그렸던 주제인 정물 시리즈가 등장한다. 그는 정물화를 통해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은유를 터득하게 되는데, 사물의 질감, 형태,화면의 구성 등에 대해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연구하게 됐고 대상에 대한 세심한 묘사와 세련된 색채 배합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를 통해 기존 가치에 대한 항의, 혹은 새로운 창조를 위한 주장이나 패러디 문화의 전형으로 보여지지만, 결과에 대한 관점 구분은 없다.단지, 관객에게 회화의 역사에 대한 교훈을 알려주고 있다는 점이다.

“ 나는 모든 것을 그릴 수 있기 바란다. 마리 앙투아네트까지도, 그러나 나는 항상 내가 그리는 모든 것들이 라틴 아메리카의 정신이 깃들여지기를 바란다.”  보테로는 자신의 문화적 뿌리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가 살아온 세계로 우리의 관심을 유도한다.

보테로, '거리'. oil on canvas, 200x139cm, 2000.(사진=국립현대미술관)
보테로, '거리'. oil on canvas, 200x139cm, 2000.(사진=국립현대미술관)

그가 보여 주는 독창적이면서 다양한 주제는 라틴문화를 형성하는 풍부한 토양 그 자체로부터 비롯된다.  ‘라틴 의 삶’은 라틴 문화의 근원에 대한 보테로의 관점을 보여주는 동시에 라틴 사람들의 보편적인 삶을 다루고 있다.

축구장, 파티, 카드하는 사람들 등등은 중남미 지역에서 일상적으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러한 화면의 특징은 실제 경험이 영향을 미친 구체적인 사건, 사실에 대한 정보와 인식이 간접적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작가는 자신이 인식하고 있는 바를 가감 없이 화면에 옮겨 담았던 것이다.

여기에서 보테로는 라틴 문화를 형성하는 주체는 바로 집합적인 인간이며, 표준화되어진, 익명성의 인간은 그러한 문화의 주제인 동시에 수취인임을 주장 하고 있다.

보테로, '얼굴'. oil on canvas, 203x170cm, 2006.(사진=국립현대미술관)
보테로, '얼굴'. oil on canvas, 203x170cm, 2006.(사진=국립현대미술관)

보테로의 작품이 다큐멘터리적이며, 기록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음에도 딱딱하게 보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 자신이 라틴 사람으로서 라틴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에는 따뜻한 서정성과 삶에 대한 은유가 담겨져 있으므로 관객들에게 사회의 부조리에 대하여 직설적인 고발 혹은 폭로보다 더욱 의미심장하고 설득력 있게 호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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