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도균의 그림 이야기] '전시장 가는길 1'
[권도균의 그림 이야기] '전시장 가는길 1'
  • 권도균
  • 승인 2017.12.02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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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아트스페이스 H ] "연필로 세상을 꼬집는 화가 이지영의 인물원 이야기"

​어제는 카톡 문자 한 통을 받았다. 대표님, 제가 보내드린 엽서 받으셨지요. 인사동에서 개인전 하고 있어요. 한번 들러주세요. 개인전 전에 미리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전시 준비하느라 이제야 연락을 드려요. 잘 받았답니다. 전시 축하드려요. 좋은 결과 있기를 기대할게요. 내일 전시 보러 가도록 할게요. 시간 살짝 말씀해주시면 전시장에 있을게요.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살며시 들릴게요.​

이지영, '어떤 공동체'. pencil on paper, 117×162cm, 2017.
이지영, '어떤 공동체'. pencil on paper, 117×162cm, 2017.

​인사동 갤러리 밈 전시장에 갔다. 처음 가보는 전시장에는 조용한 정적이 흘렀다. 3층과 4층 전시장을 통틀어서, 관람객은 중년의 남자와 나 둘 뿐이었다. 큐레이터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작품을 완성하는데 시간이 의외로 오래 걸리는 이지영 작가의 작업 방식으로, 이 많은 대형 작품들을 완성해내느라 무척 고생했을 것이다.

이지영 작가를 알게 된지 어느새 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어리게만 보였던 가녀린 소녀는 성숙한 숙녀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북촌 갤러리 시절 2009년 신진작가 그룹전 전시로 알게 되어, 2010년과 2013년 두 번의 개인전을 한 적이 있었다.​

작가의 첫인상은 수줍음을 많이 타는 소녀 같았다. 예쁘장한 외모에 살짝 미소 짓는 모습은 타고난 매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작품을 통해서 작가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면, 연약함은 이내 고집에 가까운 집요함과 고통을 인내하는 강한 모습으로 바뀐다. 

태어나서 제일 먼저 만났던 필기구는 연필이었다. 어릴 적 어머니께서는 연필을 곱고 예쁘게 깎아주셨다. 연필을 쥐고 공책에 책받침을 넣고, 연필을 꾹꾹 눌러 필기했던 기억은 아련한 추억이 됐다.

연필이란 도구는 볼펜의 편리성에 점점 인기를 잃어가고 있다. 연필이란 아이는 한 번씩 깎을 때마다, 조금씩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고마운 아이다.

성신여대 학부와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이지영 작가는 붓 대신 연필을 잡았다. 연필 한 자루만 있으면, 먹이나 물감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가성비 좋은 미술 도구라고 생각했나 보다.

어쩌면 그림을 그리기 위해 먹을 갈 거나 물감을 짜는 번잡한 준비 의식에 시간을 낭비하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2013년 개인전에서는 작품 옆에 작업을 하면서 사용했던 몽당연필 수십 자루를 모아서 설치했다. 작가와 동고동락했던 연필들에 대한 존경심이라고 느꼈다.

작가는 2H나 3B 연필로 무수히 많은 선을 그어간다. 이태리 장인이 한 땀 한 땀 만들었다는 수제 옷처럼, 땀 한 방울 한 방울과 바꾸었을 무수히 많은 선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들이 작품 속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지영, 'first apple'. pencil,acrylic on paper,130×140cm, 2017.
이지영, 'first apple'. pencil,acrylic on paper,130×140cm, 2017.

작가는 연필만이 갖고 있는 특성을 좋아한다. 가는 선의 부드러움과 연약함, 그리고 그것들이 쌓여가며 만들어내는 단단함을. 연필은 외유내강의 품성을 지닌 작가를 꼭 닮았다. 

작가는 여리디여린 연필선을 사용해서, 세상의 잘못된 풍경을 바로잡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갤러리에서 전시했던 2010년 전시 제목은 그들의 천지창조였고, 2013년은 검은 인물원이었다. 그들의 천지 창조는 급속한 과학 문명의 발전을 바탕으로 신을 흉내 내려는 인간의 욕망을 꼬집었다.​

동물원을 좋아하는 작가는 우연히 그곳에서 만난 나무로 깎아 만든 코끼리 형상을 보고 생각한다. 나무 재질의 코끼리를 동물로 인식해야 할까, 아니면 식물로 인식해야 할까라는 명제를 던진다. 인간의 욕망이 빚어낸 이러한 현상을 보고, 식물로서도 동물로서도 본래의 모습을 빼앗긴 자연의 정체성 또는 가치의 상실이라고 규정한다.​

검은 인물원은 동물원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든 작가의 고유 용어다. 인간이 창조한 인공적인 동물원에 갇혀서 통제 받으며 살아가는 동물들의 슬픈 세계를 인간들이 사는 현실의 세계에 대입한다. 작가의 관점에서는 동물원이나 인물원이나 동일하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인물원 작품 속에 등장하는 검은 산수는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만들어진 관습, 규율, 법, 상식을 상징한다. 현재를 사는 우리는 애석하게도 스스로 원하는 자유로움 그대로 삶을 살아갈 수 없다.

관습이나 법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규제와 통제는 개인 자유에 대한 억압이고, 본성을 가둔다고 생각한다. 인물원 작품들 사이에 수 백 개의 동일한 문구들로 이루어진 작품 몇 개가 있었다. 너는 너의 길을 걸어라는 작품 제목을 통해서, 작가는 스스로도 창의적인 삶을 추구해보려고 시도한다.

오늘 본 2017년 현재 전시는 '인물원 FIRST APPLE'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첫 번째 사과는 아마도 성경의 선악과를 지칭하는 듯 생각된다. 선악과를 먹을지 말지의 선택을 관람객에게 넘긴다. 나의 의지와 나의 선택으로 삶을 만들어가라는 작가의 메시지다. 인물원에서 제공하는 안락한 삶 대신, 스스로 개척하는 삶을 살아가라는 따뜻한 조언을 남긴다. 나의 삶은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나의 것이다.   ​

사회를 풍자 비판하는 메시지가 담긴 인물원이나 천지창조보다는, 어릴 적 살던 집을 그린 작품이나 과수원을 그린 작품이 개인적으로는 더 좋다. 작가의 따뜻한 감성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욕망이 빚어낸 부조리로 가득 찬 세상이 그녀의 따뜻한 마음을 사회 비판적으로 바꾸어버린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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