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1세대 백영수 화백 "모성애로 드러낸 사랑과 행복, 100살까지 그릴 터"
추상1세대 백영수 화백 "모성애로 드러낸 사랑과 행복, 100살까지 그릴 터"
  • 왕진오
  • 승인 2017.12.25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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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포=왕진오 기자] 20대 젊은 나이로 프랑스 파리에서 붓을 잡은 지 35년의 시간이 흐른 2011년 고국으로 돌아온 노화백의 눈빛에는 여전이 어린 시절 눈가에 맺혔던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동경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아트사이드 전시 작품과 함께한 백영수 화백'.(사진=왕진오 기자)
'아트사이드 전시 작품과 함께한 백영수 화백'.(사진=왕진오 기자)

'모자상(母子像)' 작가로 유명한 백영수(95) 화백이 4년여만의 개인전을 2016년 9월 23일부터 서울 통의동 아트사이드 갤러리에서 갖는다. 지난해 겨울부터 최근까지 작업한 드로잉과 콜라주 그리고 대표 작품 40여점을 공개한다.

추상회화의 선구자로 불리는 백영수 화백은 1950년대부터 김환기, 이중섭, 유영국, 이규상, 장욱진 등과 함께 순수 조형이념을 표방한 추상계열 작가들의 모임인 '신사실파(新寫實派)'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현재 이 모임의 유일한 생존 작가이다.

백 화백은 당시에 신사실파 작가들 중에서 특히 이중섭과 가깝게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경제적으로나 가정환경으로나 가난하고 외로운 처지가 비슷해 말이 별로 없어도 서로가 가깝게 느끼곤 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백영수와 이중섭은 주로 금강다방에서 작업을 했고, 월간지의 삽화 그리는 일을 이중섭에게 나누어 줄 정도로 가까웠다.

'백영수 화백 아트사이드 전시 작품'.(사진=왕진오 기자)
'백영수 화백 아트사이드 전시 작품'.(사진=왕진오 기자)

백 화백에게 있어 이중섭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면서 각자의 예술세계의 바탕을 이루고 창작의 에너지를 제공하는 벗이었다고 할 수 있다.

4년여만의 전람회를 갖는 백 화백은 "화가가 좋은 장소에서 전시하는 것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을까요. 2년 전 사고로 그림에 서명을 할 수 없게 됐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손을 떨면서도 전시회를 하고 싶다는 의지에 겨울부터 작업한 작품도 선보이게 됐다"고 설명했다.

1970년대 본격적으로 등장한 소재인 '모자상'은 백 화백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대표 시리즈가 됐다.

갸우뚱한 고개가 인상적인 엄마와 아들은 70년대 화면 속에서 어두운 파스텔 톤의 녹색과 회색조로 등장한다. '파리시기'인 1980년대 작업은 갈색과 청색조, 후반에는 점차 옅은 청색조의 따뜻한 분위기로 변화했다.

이후 파리 생활이 안정되면서 화면은 이전 보다 밝은 색조로 변화했고, 소재로 등장하는 모자와 가족은 형태가 단순화되고 행복과 따스함이 느껴지는 대상으로 표현됐다.

'백영수 화백과 함께한 이동재 아트사이드 갤러리 대표와 부인 김명애'.(사진=왕진오 기자)
'백영수 화백과 함께한 이동재 아트사이드 갤러리 대표와 부인 김명애'.(사진=왕진오 기자)

백 화백 모자상에 대해 부인 김명애 여사는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한 아쉬움이 그대로 작업에 들어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18인가 19살 때 모성애에 대한 동경이 강하게 남아있다. 과거 작품 '백일몽'에도 싸리문가에 엄마가 애기를 앉고 있는 그리다가 1976년부터 조금씩 변화가 됐다. 최근에는 엄마가 50년을 매달려 있는 것 같다. '우리 엄마가 어깨를 주물러 달라'고 말을 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 공개되는 드로잉, 콜라주 작품은 백화백이 병환 중에 제작한 것으로, 작업에 대한 의지가 그대로 반영됐다. 작가의 드로잉과 콜라주는 단순화된 화면과 공간의 여백을 살린 구성 등이 돋보이며 인간, 자연의 모습을 소재로 했다.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소재들이지만 이를 재치 있게 표현하며 자신의 생각과 느낌, 순간의 영감을 함축적으로 담아냈다. 서양화가 백영수는 1922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으며, 2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유년시절과 학창시절을 보냈다.

1940년에 오사카 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했으며, 1944년에 귀국하여 목포고등여학교와 목포중학교 미술교사,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해방 후 최초의 국전이었던 조선미술전 심사위원, 대한미술협회 상임위원을 역임하는 등 한국 현대미술의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1950년대에는 김환기, 이중섭, 유영국, 이규상, 장욱진 등과 함께 신사실파 동인으로 활동했고, 1977년 이후에는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요미우리 화랑의 전속 작가로 활동했다.

'아트사이드 갤러리 백영수 화백 전시 작품'.(사진=왕진오 기자)
'아트사이드 갤러리 백영수 화백 전시 작품'.(사진=왕진오 기자)

이탈리아 밀라노 파가니 화랑 초대전을 비롯해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100여 회의 전시를 가졌다. 2011년 초에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현재까지 작품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최근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백영수 회화 70년'(2012)을 통해 그의 화업이 재조명됐고, '유영국의 1950년대와 1세대 모더니스트들'(가나아트센터, 2011), '표지와 여담'(환기미술관, 2010), '신사실파 60주년 기념전'(환기미술관, 2007) 등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하며 꾸준히 활동을 전개해 오고 있다. 전시는 10월 23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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