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가 보물창고-⑫] "16조원에 미치지 못하지만, 고구려 시대 유물로써 가치 평가"
[삼성가 보물창고-⑫] "16조원에 미치지 못하지만, 고구려 시대 유물로써 가치 평가"
  • 왕진오
  • 승인 2017.12.27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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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국보 제11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아트인포=왕진오 기자] 의자에 앉아 왼발은 내리고, 오른발은 왼쪽 다리 위에 걸쳤으며, 오른쪽 팔꿈치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손가락을 뺨에 댄 채 명상에 잠긴 반가사유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국보 제11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사진=왕진오 기자),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사진=문화재청)
왼쪽부터 국보 제11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사진=왕진오 기자),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사진=문화재청)

금동으로 만들어진 우리 문화재의 대표 주자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설명하는 말이다. 국내외에 다수의 반가사유상이 존재하지만 크기나 예술성에서 국보 83호에 비할 바가 못 된다는 것이 중론이다. 또한 가치를 알 수 있는 보험 평가액 부문에 있어서도 국보 83호가 미국 전시를 위해 가입했던 보험가액 500억 원에 훨씬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의견도 지배적이다.

※국보 제11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이건희 삼성 회장 소유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1944년 평양시 평천리에서 공사를 하던 중 출토된 것으로 알려졌다. 높이가 17.5cm로 전면에 녹이 많이 슬었고 오랜 기간 침식된 흔적과 불에 탄 자국마저 남아 있지만 드물게 고구려시대 반가사유상인데다 출토지가 확실하다는 점에서 1964년 3월 30일 국보로 지정됐다.

국보 11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군데군데 도금이 벗겨지고 표면 손상이 심한 편이며, 사유(思惟)의 자세를 나타내는 오른팔의 아랫부분이 빠져 없어졌다. 머리에는 산 모양의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있으며 고개를 약간 숙이고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다. 얼굴은 네모난 형으로 눈을 반쯤 감고 있고,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번져난다.

보관(보석으로 꾸민 관)에는 별도의 장식을 부착했던 흔적이 남아있다. 신체는 가냘프게 표현한 상체에 비해 하체는 대좌 밑으로 내려갈수록 비대해져 육중한 느낌을 주는데, 이 부분은 구리의 두께도 두껍고 치맛자락과 옆구리에서 늘어뜨린 요패장식도 깊게 조각돼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에 공개된 국보 118호'.(사진=왕진오 기자)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에 공개된 국보 118호'.(사진=왕진오 기자)

연화대좌와 족좌가 함께 조각된 점은 금동제 반가사유상에서는 처음 나타나는 형식이며, 이 반가상의 경우 족좌 앞쪽이 심하게 돌출됐다. 원을 사등분한 보관의 형태는 국보 83호 반가사유상과 전 황룡사지 출토 반가사유상 머리 등에서도 살펴 볼 수 있는데, 옛 신라지역 반가사유상의 특징이기도 하다.

전체를 하나로 주조했는데, 상반신은 내부가 동으로 꽉 차있으며 대좌 아랫부분은 비어있다. 네모진 얼굴과 가늘고 긴 신체, 원통형의 팔, 도식적인 옷 주름 등에서 중국 수(隋) 양식이 반영됐음을 알 수 있다.

고재식 한국미술품감정센터 대표는 “리움 소장의 국보 제11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출토지가 분명하고 보기 드문 고구려 불상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한국의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단순한 모방을 넘어서 제작 당시 한국인의 심상과 염원을 담은 부처의 모습 새롭게 창조했다는 점, 민중을 구제하고 내세의 희망과 염원을 담은 미래불을 제작했다는 점 그리고 국보 제78호와 제83호, 신라인이 제작한 것으로 전해지는 일본 광륭사의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에서 보듯 형식미와 예술미를 완성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화제가 된 것은 보험가 500억 원에 달하는 국보 83호를 2013년 8월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서 열린 '황금의 나라, 신라'전에 전시한다는 발표 때문이다.

이 금액에 대해 해외전시 전문 회사 관계자는 “외국을 오가는 예술품의 경우 작품 가격에 0.3%를 산정해 추산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전쟁이나 테러 등의 특약 조건이 발생할 경우는 보험가도 높아지지만, 전시를 진행하는 주최 측 입장에서는 작품가를 높이면 보험료도 높아지기 때문에 낮추는 것이 관행이다“고 설명했다. 이를 근거로 계산하면 16조 원에 달한다.

이 관계자는 “국보나 보물 같은 문화재는 산술적인 금액으로 평가할 수 없기 때문에, 상호 협의로 보험가를 산정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덧붙였다.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사진=문화재청)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사진=문화재청)

당시 문화재청은 국보 83호가 그동안 무려 2600 여일이나 해외로 나갔는데 또 나가면 훼손을 입을 우려가 있다며 미국 전시를 위한 반출에 난색을 표명했다. 하지만 미국 메트로폴리탄 캠벨 관장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서한까지 보내 미국 전시를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한 이후 11일 만에 반출 허가가 났고, 국가 원수 급의 경호를 받으며 미국행 비행기를 타게 됐다.

금동으로 제작된 반가사유상은 삼국시대에 걸쳐 크게 유행했는데 국보 83호가 가장 최초의 예로 주목된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국보 제83호는 국내에서 가장 큰 금동반가사유상으로 높이가 93.5cm이다.

머리에는 왕관 형식의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관 띠를 이마 위의 관에 묶어 귀 좌우로 내려뜨렸다. 보관에는 탑 모양이나 일월(日月) 모양 또는 보주(寶珠)라고 불리는 장식이 세 가닥으로 올라갔으며, 중앙의 윗부분은 절단됐다. 이 부분들이 구슬이나 해와 달을 상징한다고 보기보다는 오히려 탑 모양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중요하다.

얼굴은 네모꼴에 가깝지만 눈과 뺨이 두드러져 강인한 인상을 풍긴다. 그러나 눈을 가늘게 반쯤 뜬 모습에 콧날은 오뚝하고 광대뼈는 나오고 입가는 들어가는 음양각의 조형미를 살려냄으로서 미소가 가득하도록 형상화하는데 성공한 걸작이다.

특히, 자연스러운 미소와 개성이 살아나면서 한국적인 보살 얼굴을 성공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네모꼴 얼굴에 광대뼈가 나오면서 입가를 들어가게 해 얼굴에 가득한 웃음 짓는 표정은 전형적 우리나라 사람의 특징 있는 모습이다. 즉, 이 상은 한국적 불상형을 최초로 조형시킨 보살상이라는 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는 평가다.

천의(天衣)는 목 뒤로 돌아 양쪽 어깨를 덮어 일단 새 깃처럼 반전된 뒤 다시 가슴 쪽으로 흘러내려 왼쪽 다리에서 서로 교차된 다음 양 무릎을 지나 두 팔을 감아 내렸다. 천의 자락이 이루는 부드럽고도 율동적인 곡선미는 유연한 형태미를 그대로 반영했다.

하체에 입은 치마(裳衣)는 다소 두툼하면서도 탄력 있게 나타냈으며, U자형의 옷주름 선이 능숙하게 처리됐다. 치마는 맞뚫림 조각 모양의 돈자를 덮기 위해서 비현실적으로 과장됐다. 오른쪽 다리의 무릎 밑에 두꺼운 옷자락을 받친 점이나 옷자락이 흘러내려 돈자를 전체적으로 감싼 상현좌를 이룬 점 등에서 과장성도 드러난다.

치맛자락은 앞면과 측면에 걸쳐 다리를 포함해서 네 가닥으로 흘러내렸다. 뒷면은 규칙적인 주름이 돈자 덮개에서 한 번 물결 지다가 돈자에서는 다시 두 가닥의 자락을 이루고 있다. 이 옷자락들은 U자형을 이루며, 사이에 Ω자형의 주름을 보여준다.

허리띠는 배에서 한 번 나비매듭을 짓고, 양 허리에서 흘러내려 엉덩이 밑으로 들어간 띠는 다시 나와 매듭을 지은 뒤 흘러내리고 있다. 띠에는 구슬무늬와 격자무늬를 정교하게 새겼다.

큼직한 왼쪽 발은 족좌(足座) 위에 듬직하게 올려놓았으며, 타원형의 발 대좌에는 연꽃을 곧추세운 힘찬 연꽃무늬를 뚜렷하게 부조했다. 네모난 얼굴에 광대뼈를 나오게 하면서 만면한 미소를 띤 이 불상의 모습은 한국적인 얼굴을 성공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크게 주목된다.

1910년 서울의 한 골동품상이 예사롭지 않은 불상을 확보하고 있다는 얘기가 은밀하게 돌았다. 소문을 접한 이왕가미술관(현 덕수궁미술관)은 불상의 실체를 확인한 뒤 2600엔이라는 거금을 주고 구입했다.

당시 골동품상은 경주에 살던 노부부가 경주 남산 입구에 위치한 오릉에서 수습한 것이라고 전했다고 한다. 1930년대 간송 전형필이 구한 불상의 경우 현재 시가로 60억 원이 넘는 다는 것을 볼 때 그 가치를 짐작할 수 있다.

이 불상이 바로 종교적 평온함과 예술적 완성도가 어우러져 '한국조각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하 83호)이다.

한참 뒤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고(故) 황수영 씨는 추적 조사를 통해 83호가 경주 내남면 남산 서쪽 기슭의 사찰에서 발견됐다는 것을 밝혀냈다. 경주 남산이 83호 출토지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 불상은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이관됐다가 광복 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소유권이 넘어왔다.

논란 끝에 뉴욕전시회 출품이 결정된 83호는 명실상부한 우리 문화재의 대표 주자다. 국립중앙박물관과 문화재청 간 갈등이 빚어진 것도 이 불상의 가치가 그만큼 높다는 방증이다. 광복 이후 전시를 위해 해외에 아홉 번이나 나갔고 날수로 계산하면 3000일이 넘는 단골 출품작이라는 점도 그러하다.

입체적이면서 자연스러운 옷 주름, 꼼지락거리는 듯 한 손과 발가락은 생동감의 극치를 보여준다. 선명한 이목구비 위에 은은하게 퍼지는 고졸한 미소는 보는 이로 하여금 평온함과 함께 신비감마저 느끼게 한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 최순우는 이 알 듯 모를 듯 한 미소에 대해 "슬픈 얼굴인가 보면 그리 슬픈 것 같지 않고, 미소 짓고 있는가 하면 준엄한 기운이 누르는,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 없는 거룩함"이라고 묘사했다.

오른쪽 다리를 왼쪽 무릎 위에 올려놓은 반가(半跏)의 자세로 앉아 왼손을 오른쪽 다리 위에 두고 오른쪽 팔꿈치는 무릎 위에 붙인 채 손가락을 살짝 뺨에 대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형상의 불상을 흔히 반가사유상이라고 한다. 반가사유상은 부처가 어린 시절 인생무상을 느끼고 중생 구제를 위해 고뇌하는 모습을 표현한 '태자사유상'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83호가 8~9세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유다.

반가사유상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에서 모두 만들어졌다. 6세기 후반부터 7세기에 걸쳐 다수 제작되고 예배됐다. 민병찬 국립중앙박물관 연구기획부장은 "83호의 제작 시기는 7세기 초, 구체적으로 630~640년 선덕여왕 때인 것으로 해석한다"고 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왼쪽)과 국보78호(사진=왕진오기자)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왼쪽)과 국보78호(사진=왕진오기자)

83호는 일본 국보 1호인 고류사 불상과 곧잘 비교된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야스퍼스가 "이야말로 고대 그리스나 고대 로마의 어떤 조각 예술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며 감히 인간이 만들 수 없는 살아 있는 예술미의 극치"라고 극찬했던 불상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신라에서 제작돼 7세기 초 일본으로 넘어온 고류사 불상은 한국계 혈통인 쇼토쿠(聖德) 태자를 거쳐 신라인이면서 교토 호족이던 진하승(秦河勝)에게 전해졌다. 진하승은 호코사를 창건해 불상을 안치했는데 이는 고류사의 옛 이름이다.

그런데도 일본은 한때 한반도에서 건너간 장인이 조각한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하지만 나무 재질이 한반도에만 자생하는 적송(춘양목)임이 드러나면서 거짓임이 입증됐다. 재질만 다를 뿐 두 불상은 모양이 흡사하다. 1994년 일본 국보수리소 다카하시 준부가 결국 "두 불상은 같은 공방에서 한 장인에 의해 제작된 것"이라고 발표하면서 83호가 고류사 불상의 원형임을 시인했다.

83호는 무게 112.2㎏에 높이가 93.5㎝다. 고류사 것은 이보다 작다. 얼굴은 상대적으로 83호가 가냘프다. 고류사 불상은 안면에 옻칠을 하기 위해 천을 덧씌웠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83호가 고류사 불상을 능가하는 것은 청동으로 주조했다는 점이다. 신소연 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청동 두께가 5㎜에 불과한데도 흠집이 발견되지 않아 신라인의 놀라운 주조 기술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세계적으로 83호와 같은 청동상은 매우 귀하다. 전쟁 때 모조리 녹여 무기로 사용해서다. 야스퍼스가 83호를 접했다면 어떤 평가를 내렸을지 궁금할 따름이다. 83호는 단순함을 강조한 둥근 조형감이 돋보인다. 머리에 얹은 보관도 아무런 장식 없이 둥근 산 모양으로 제작됐다. 허리 아래쪽은 치마의 일종인 군의(裙依)가 입혀져 있다.

군의 주름은 두 다리를 덮으면서 무릎과 다리의 양감을 강조하고 있다. 뒷머리에는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를 붙였던 흔적이 있으며 귓불에는 구멍이 뚫려 있다. 감마선을 투과한 결과, 불상의 팔과 다리, 몸통 내부에는 주조 과정에서 뼈대로 사용했던 철심이 발견됐다. 왼쪽 다리는 별도로 마련된 연화족좌(蓮花足座) 위에 놓여 있는데 왼쪽 발과 족좌의 앞부분은 후대에 수리된 것으로, 원래는 크기가 좀 더 컸을 것으로 추측된다.
민 부장은 "수리한 부분에서 본체에는 없는 납 성분이 검출됐다"며 "양식을 볼 때 보수 시기는 통일신라시대 후기일 것"이라고 했다.

83호의 가격은 얼마쯤이나 될까. 2013년 83호 보험가액이 역대 최고가인 500억 원으로 책정돼 주목받은 바 있다. 그러나 '미국 미술 300년 전'에 나왔던 제스퍼 존스의 작품이 1000억 원을 호가한 점 등을 고려할 때 우리나라 최고 걸작의 가격은 보험가액을 훨씬 능가하는 수준일 것이라는 평가다.

고재식 대표는 “불교에서 유교로, 유교에서 다종교 사회로 변화한 현대에 있어서 불교 문화유산은 우리 모두에게 신앙과 종교의 차원을 넘어서 한국인의 사상과 한국미의 근원을 찾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신앙과 종교적 측면으로만 우리의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것은 큰 문제이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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