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기자의 화랑가 돋보기] 진화랑, 40년 역사의 발자취...마지막 황손 이구와의 러브스토리
[왕기자의 화랑가 돋보기] 진화랑, 40년 역사의 발자취...마지막 황손 이구와의 러브스토리
  • 왕진오
  • 승인 2017.12.29 14: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트인포=왕진오 기자] 경복궁 돌담길 고즈넉한 도로에 빨간 벽돌의 단아한 건물이 주변의 경관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있는 문화공간이 있다.

'진화랑 외경'.
'진화랑 외경'.

유심히 눈 여겨 보지 않아도 첫 눈에 들어온 느낌은 예사롭지 않은 건물로 받아들여진다. 이 곳은 화랑가 1세대의 대모인 유위진(2010년 8월 작고)회장이 1977년 사간동에서 통의동으로 이전하면서 기존 건물을 조선마지막 황세손 이구씨에 의해 공사된 진화랑이다.

진화랑은 1972년 10월 서울에서 개관했다. 40년의 시간 동안 김환기 와  남관 같은 한국 작가들을 포함하여, 대표적인 현대 미술가들의 작품을 대중에 소개해 온 한국 화랑계의 중추 역할을 수행해 온 저력 있는 화랑이다.

고 유위진 회장은 1931년 경남 양산의 유복한 집안에서 7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이화여대 음악학과에서 공부를 했고 시를 잘 썼던 문학소녀로 알려졌다.  당시 여성도 자기 전문 분야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문화계 인사들과 교우하며 다양한 분야의 진출을 모색하던 유회장이 선택한 것이 바로 그림을 사고 파는 화랑이었던 것이다.

야요이 쿠사마와 함께한 고 유위진 회장.(사진=진화랑)
야요이 쿠사마와 함께한 고 유위진 회장.(사진=진화랑)

유 회장에게는 특별하면서 애틋한 러브스토리를 갖고 있어, 화제가 되었다. 바로 조선 마지막 황세손 이구(李玖. 1931-2005)씨와의 관계이다.

이구 씨는 조선마지막 황세손으로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아버지 영친왕에게서 태어나 한국어조차 제대로 배울 수 없었던 대한제국의 황세손이다.  알려진 대로 이구 씨는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사이의 직계 손으로 독일계 미국인 여성과 결혼 후 미국에서 건축학을 공부했으나 직계 자손이 없다.

당시 한국을 드나들던 이구 씨는 이화여대 출신의 유위진씨가 통역을 해준 것을 계기로 가까워졌고, 이후 두 사람은 8년 정도 내연의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미술계에서는 잘알려졌다.

이구씨가 유위진씨를 ‘진’이라고 부르면서, 유위진회장이 설립한 화랑 이름이 진화랑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진화랑의 설계와 청운동 자택의 건물을 설계한 이도 바로 이구 씨이다.

'1082년 피카소 전 당시 삼성 이건희 회장'.
'1082년 피카소 전 당시 삼성 이건희 회장'.

당시 이방자 여사가 비원에 거주하면서 두 사람의 실질적인 관계를 인정했고, 방한하는 일본 VIP들을 진화랑에 소개해, 진화랑은 많은 작품들을 일본인들에게 판매 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일본인 컬렉터와의 만남은 진화랑이 도약을 하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고 한다. 바로 소장품의 판매로 얻은 자금을 가지고 현재의 진아트센터를 1991년에 추가로 개관하게 된 것이다.

또한 유 회장이 한창 활동하고, 이방자 여사가 서울에 거주할 때는 미국의 뱅크오브아메리카 회장과 삼성가를 포함, 많은 대기업들이 진화랑과 작품 거래를 한 것은 화랑가에서는 공공현한 비밀로 전해지고 있다.

현대미술사의 궤적 그리고 한국 미술의 세계화

진화랑은 1972년 10월에 사간동 현재 금호미술관 옆의 법련사 자리에서 화랑업의 시작을 하였다. 이 지역에 화랑을 운영한 것은 진화랑이 유일했다. 유 대표는 처음 하는 문화 사업으로 인해 몸살이 날 정도로 매 전시에 열정을 기울였다고 하는데, 당시는 우리 정치사의 크나큰 혼돈이 일어났던 시기였다.

미술 전시 행사를 진행하려 해도 공안 기관의 제제가 함께 따라 다니던 그 시절, 박서보 작가로 하여금 종로경찰서에 협조를 구했고, 당시 육영수 여사에게 초청장을 보내고 나서야 작가들이 함께 모여 전시를 열 수 있을 정도였다.

또한 1973년 한일 현대작가전을 일본에서 개최하면서 ‘이방자’여사의 소개로 일동화랑 사장을 만나면서 일본 진출의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게 되어, 일본에서의 전시를 대규모로 개최하게 된다.

'1982년 호암미술관 방문시 Maya 가족과 홍라희 관장, 후지TV 회장 야마모토 부부와 함께한 고 유위진 회장'.
'1982년 호암미술관 방문시 Maya 가족과 홍라희 관장, 후지TV 회장 야마모토 부부와 함께한 고 유위진 회장'.

당시 전시를 하면서 일본 방위대상과 게이오 대학교 교수와 동경대 교수들이 총 집합을 할 정도 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들과의 인연은 자신이 화상을 하기 이전에 쌓아온 것이라 그들의 도움으로 김환기, 박수근, 청전, 운보의 작품을 시가보다 10배 이상의 가격으로 전부 팔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유 회장이 일본 전시를 진행한 이후, 일본 후지TV 갤러리에서 진행되고 있던 쿠사마 전시를 관람 하면서 그의 작품 몇 점을 구입하게 되면서 맺어진 인연은 그의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어졌다.

더불어 동양의 양대 화가로 잘 알려진 이우환 작가와의 인연은 Fiac 84 당시 그의 작품을 가지고 전시회를 개최하면서부터 이었다고 한다.

당시 퐁피두 주최의 칸딘스키 나이트에 모든 음식에 그의 이름인 칸딘스키가 붙어 있는 것을 보고선 자신이 가지고 갔던 작품 중 한 점이라도 퐁피두에 소장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지게 됐고, 1986년 이우환 자택에서 구입한 그의 작품을 프랑스 퐁피두 미술관에 판매를 하게 되었고, 1970년 국내 최초로 이우환의 수채화 전시를 개최하게 되었다.

FIAC 1984 당시 진화랑 부스내에서  시라크 당시 파리시장과 함께한 고 유위진 회장.
FIAC 1984 당시 진화랑 부스내에서 시라크 당시 파리시장과 함께한 고 유위진 회장.

한국 미술의 세계화 발판 마련

한국 최초로 FIAC84에 참여를 할 당시 진화랑은 월전의 매화, 장미, 일본 작가 미아나마 다께시코의 작품을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에게 그림을 매각한 대금을 가지고 참여를 할 정도로 자금의 여유가 별로 없던 시기였다.

생전의 유위진 회장은 “당시는 통신시설이 요즘처럼 발달하지 않았지요, 주최 측에서 보낸 텔렉스에 참가가 어렵다는 문구를 보고나서 바로 파리로 날아가서 담판을 지었지요, 그들이 참가비를 이유로 난색을 표명했는데, 내가 원래 예약한 공간보다 거 큰 공간을 임대 할 수 있다고 하여 8천불에 계약을 하게 되었지요”라며 당시 외국 미술계가 한국을 바라보는 단면을 술회하였다.

이처럼 어렵게 진출한 해외 아트페어에 이우환, 류경택, 남관, 황주리와 오세열 작가등과 함께 참여를 하게 되었고, 전시 기간 동안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과 문화부 장관과의 인연도 만들게 되었다.

당시로서는 해외미술시장에 대해 눈을 돌리지 않았던 시기에 유위진 회장은 프랑스, 일본 전람회등 국제적인 해외 아트페어에 단독으로 진출하면서 오늘의 입지를 구축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해외 활동으로 한국 작가들의 작품이 세계적으로 알려졌고, 프랑스 퐁피두미술관 컬렉션이 될 정도로 우리 미술의 세계화와 명성을 쌓는데 커다란 공적을 남겼다.

생전에도 “화랑의 행보를 외부에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아요, 자연스럽게 그들의 발전에 초석이 될 정도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는 것이지요, 한 작가의 발굴 이후 우리는 그들을 붙잡아 놓기 보다는 날개를 달아주어야 하고 더 좋은 환경의 화랑에게도 전시 기회를 부여해야 해요”라고 술회했었다.

1982년 Akasaka, 이방자여사와 함께한 고 유위진 회장.
1982년 Akasaka, 이방자여사와 함께한 고 유위진 회장.

“사람과의 관계를 진행 할 때 우정과 신의가 있으면 어려운 시기에도 성공의 계기가 될 것 같아요”

사람에게 행복감을 주어야 하는 화랑을 지켜오면서 유 회장은 40년의 시간동안 화랑에 들어온 사람의 발소리를 듣고서도 연륜과 컬렉터의 깊이를 알 정도의 예지력이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외부에서 바라보는 진화랑이 과거의 영광만을 보전하는 곳이 아닌 21세기 한국미술의 세계화를 위한 선도 역할에 중추적인 역할로 지나온 시간을 발판으로, 자신과 함께 화랑의 발전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스텝들과 초심의 자세로 돌아가 미술계의 유일한 진화랑의 색채를 만들려 했었다.

2005년 7월 16일 일본 동경의 모텔에서 숨진 채로 발견된 그의 연인이었던 이구 씨의 사망 사건을 접한 이후부터 스트레스로 비만증에 시달려 왔고, 영원한 화랑가의 현역이었던 유위진 회장은 2010년 8월 2일 오후 2시 55분 향년 79세의 나이로 영면을 하게 됐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