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영 교수의 언어로 읽는 세상] '새로운 나를 만나는 즐거움'
[신지영 교수의 언어로 읽는 세상] '새로운 나를 만나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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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1.08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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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신지영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2002년 5월 27일 월요일 오전, 출근을 위해 경부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크게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는 임권택 감독이 취화선으로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는 소식과 2002년 월드컵 개막이 며칠 남지 않았다는 보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장재록, '또 다른 풍경, 스파이커'.
장재록, '또 다른 풍경, 스파이커'.

당시 천안에 소재한 한 대학의 새내기 교수였던 필자에게 월요일 아침은 특히 분주하고 정신이 없었다. 그날 출근해서 할 일들은 물론, 한 주 동안 챙겨야 하는 여러 가지 일정들을 점검하느라 머릿속이 온통 분주했다.

딴생각에 몰두하느라 집중력을 잠깐 잃었던 것 같다. 갑자기 오른쪽 차선을 달리고 있던 차와 너무 가까워지고 있음을 깨닫고 당황한 나머지 핸들을 왼쪽으로 틀면서 브레이크를 밟았다. 다음 순간, 내가 몰던 경차는 왼쪽으로 한 바퀴 반을 돌고 거꾸로 고속도로 위에 멈추었다.

전복 사고가 난 것이다. 차가 전복되던 순간, 회색빛 아스팔트가 내 시야를 오가는 속에서 내 머릿속에는 세 가지 생각이 스쳤던 것 같다. ‘나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구나. 놀이동산에서 탔던 다람쥐통을 타는 기분이 드네. 안전밸트는 정말 중요하구나’ 이 세 가지 생각이었다. 천만다행히도 다른 차들과의 2차 사고도 없었고, 왼손 엄지손가락 위쪽 손등과 이어지는 부분이 조금 찢어져서 몇 바늘 꿰맨 것을 제외하면 외상도 거의 없었다.

사고 현장의 끔찍함에 비하면 믿을 수 없는, 정말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같은 대학의 한 교수님은 출근을 하면서 사고 현장을 보고 저 차 안에 있던 사람들은 최소한 사망이겠구나 생각했다고 했다.

사고에 대한 실감이 난 것은 사고가 난 차를 보았을 때였다. 조수석 쪽 천장이 완전히 우그러져 있는 차를 보면서 정말 끔찍한 사고를 겪은 거였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특히, 내 전화를 받고 달려온 가족들은 나를 보고는 큰 사고는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가 그 차를 보고는 많이 놀랐다.

교통사고를 겪은 후 나는 내일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너무나 확실히 알게 되었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오늘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내일은 너무 늦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날 나는 죽을 수도 있었던 만큼, 그날 이후 내게 주어진 시간은 모두 덤이요 보너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늘 감사했을 뿐 아니라 언제 생을 마감한다 하더라도 크게 분할 것도, 원통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작년 어느날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만약 2002년 그 사고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면 무엇이 제일 안타까웠을까, 무엇이 제일 한스러웠을까 하는 것이었다.

내 답은 ‘오늘의 나를 만나지 못한 것’이었다. 물론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지만 그래도 2002년 그 사고를 당했던 나보다는 훨씬 성장한 오늘의 나를 만나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면 그건 참으로 아쉬운 일이었을 것 같다. 하루하루 내 보폭만큼 성장해 가며 문득문득 만나게 되는 새로운 나는 살아갈 만한 충분한 가치를 느끼게 해 준다.

보너스로 주어진 내 삶의 시간 속에서 좀 더 성숙해지고 깊어지는 나를 만날 수 있어 다행이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 속에서가 아니라 어제의 나와 비교하면서 조금씩 더 나은 내가 되려고 애쓰는 나는, 오늘 조금 실망스러운 나를 만나도 괜찮다.

오늘 만난 조금 실망스러운 나를 솔직히 인정하고 더 나은 내가 되려고 애쓰는 나만 있으면 된다. 그럼 내일은 조금 더 성장한 나를 만나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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