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 전 통한의 역사를 되짚어 미래를 대비하다, '징비록' 특별전
400년 전 통한의 역사를 되짚어 미래를 대비하다, '징비록' 특별전
  • 왕진오
  • 승인 2018.01.08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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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포=왕진오 기자] 조선 최대의 전란으로 기억되고 있는 임진왜란에 대한 여러 기록 중,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이 집필한 '징비록(懲毖錄)'이 브라운관과 서점가를 휩쓸고 있다.

'징비록' 특별전에 공개된 국보 제132호' 징비록 친필본.(사진=왕진오 기자)
'징비록' 특별전에 공개된 국보 제132호' 징비록 친필본.(사진=왕진오 기자)

방송이 종영된 이후 그가 남긴 징비록과 관련된 유물들을 한 자리에 모아 그 의미를 돌아보는 자리가 2015년 8월 5일부터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마련되어 관람객의 발길을 이끌고 있다.

서점가에는 드라마 방영에 맞춰 '소설 징비록'(이재운, 책이있는 마을), '류성룡의 징비록'(장윤철, 스타북스), '징비록'(오제진, 홍익출판사), '징비록 역사에서 길을 찾다'(엄광용, 주니어RHK), '책임지는 용기, 징비록'(최지운, 상상의집) 등 2015년에 출간된 징비록 관련 서적은 무려 29권이다.

그동안 임진왜란과 관련된 드라마나 영화 그리고 소설에는 이순신이나 권율 등 전장에 직접 참여해 전적을 세운 장수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류성룡은 약방의 감초 마냥 잠시 등장하거나 자막으로 그가 주장했던 '제승방략' 체제에서 '진관체제'로의 복귀에 관련한 내용이 있었다는 기록만 비추어졌다.

'눈물과 회한으로 쓴 7년의 전란의 기록'을 감수한 김석근 건대 강사는 “'징비록'은 임진왜란을 다룬 유일한 기록문이 아니다. 하지만 전쟁의 경위와 전황에 대한 충실한 묘사에 그치지 않는다”며 “조선과 일본, 명나라 사이에서 급박하게 펼쳐지는 외교전을 비롯해, 전란으로 인해 극도로 피폐해진 일반 백성들의 생활상, 전란 당시에 활약한 주요 인물들에 대한 묘사와 인물평까지 임진왜란에 대한 입체적인 기록이라는 평가를 받는다”고 설명했다.

'징비록' 특별전에 공개된 류성룡이 썼던 보물 제460-1호 투구.(사진=왕진오 기자)
'징비록' 특별전에 공개된 류성룡이 썼던 보물 제460-1호 투구.(사진=왕진오 기자)

‘징비(懲毖)’는 시경(詩經)에서 따온 말로 ‘지난 일을 경계하여 후환을 대비한다’는 뜻이다. 이 같은 목적으로 저술된 ‘징비록’은 조선시대 최고의 기록문학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기록문학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징비록’의 저술 연대를 보여주는 명확한 기록은 현존하지 않는다.

다만 류성룡이 ‘징비록’의 저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용한 사료나 공문서들에 대한 검토 시간을 고려할 때,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한 지 3~4년째가 되는 1601년 혹은 1602년 무렵이 본격적으로 집필에 들어간 시기일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의 사망 이후 책장에 묻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할 수도 있었던 ‘징비록’은 1633년 그의 아들 진에 의해서, 생전에 쓴 글들을 엮은 ‘서애집(西厓集)’과 함께 간행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안동의 하회종가(下回宗家)에 보관되어 있는 류성룡의 친필 초본과 더불어, 초판을 기초로 간행된 16권본과 2권본 등 두 가지 판본 또한 전해지고 있다.

>미래를 위해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의 기록

류성룡은 이순신이 전사하고 왜란이 끝나는 시점에서 일본과의 화친을 주장해 나라를 그르쳤다는 죄목으로 모든 관직을 삭탈 당한 채 고향 안동 하회로 돌아간다.

그는 제자를 가르치면서 조선의 뒷날을 위해 그가 온몸으로 겪었던 임진왜란의 경험과 역사적 사실 등을 정리하고, 그의 ‘충’을 보여주기 위해 경계하고 삼가는 마음으로 ‘징비록’을 썼다.

'징비록' 특별전에 공개된 '난후잡록'.(사진=왕진오 기자)
'징비록' 특별전에 공개된 '난후잡록'.(사진=왕진오 기자)

'징비록'은 7년여에 걸친 전란 동안 조선의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참혹한 상황을 기록하고 일본의 만행을 성토하면서, 그러한 비극을 피할 수 없었던 조선의 문제점을 낱낱이 파헤침으로써 후대에 교훈을 주고 있다.

'징비'의 정신은 '역사를 잊지 말자'는 다짐에서 출발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는 없고, 적개심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전란이 끝난 뒤 류성룡은 임진왜란 같은 참화를 피하기 위해서는 지도자의 능력과 책임감, 비전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국립민속박물관의 '징비록' 특별전은 "징비록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에서 꾸려졌다. 류성룡이 임진왜란의 피난 중에 영의정과 도체찰사(군사령관)가 되어 7년여 동안 선조를 보좌하면서 민심을 수습하는 등 국난 극복의 흔적이 느껴지는 고문서 및 유품들이 전시된다.

특히 국보 제132호 '징비록' 원본과 보물 제160호 '난후잡록', 보물 제460호 '투구와 갑옷'등 30여 점의 유물이 서울 나들이를 갖는다.

또한 '징비록'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만날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류성룡은 그가 제안해 작성한 문서나, 이에 선조가 결정해 내린 문서 등을 모두 이면지를 활용해 필사해두거나, 명나라 책력인 대통력(大統曆) 등에 그 때의 감회 등을 적어두었다.

'징비록' 특별전에 공개된 류성룡이 받은 영의정 임명 교지.(사진=왕진오 기자)
'징비록' 특별전에 공개된 류성룡이 받은 영의정 임명 교지.(사진=왕진오 기자)

훗날 류성룡은 하회 옥연정사에서 이들 기록들을 참조하면서 그가 경험했던 감회 등을 서술해 처음에는 '난후잡록'이라 했으나, '시경(詩經)' 소비(小毖) 편의 "나는 지난 일을 경계하여 후환을 삼가다"는 내용을 참조해 최종으로 '징비록'이라 명명했다.

이 전시는 풍산 류 씨 집안의 가족 이야기 '충효 이외 힘쓸 일은 없다'의 연계 전시로, 안으로는 '효'를 바탕으로 집안을 다스리고, 밖으로는 진정한 '충'을 실천했던 류성룡 집안의 이야기를 통해 가족과 사회에 대한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기회이다. 전시는 9월 3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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