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가 보물창고-③] 이건희 회장 소유 국보 제216호, 217호
[삼성가 보물창고-③] 이건희 회장 소유 국보 제216호, 217호
  • 왕진오
  • 승인 2017.10.18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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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포= 왕진오기자] 문화재를 다루는 복수의 전문가들은 “국보라는 이름은 국민이 부여한 것이다.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경우라도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 한 국민들이 실물을 감상하기란 하늘의 별따기 수준이다. 법적으로 개인 소유물일지라도 넓은 의미에서는 국민 모두의 것이라는 점은 이의가 없을 것이다"고 입을 모았다.

또한 “국보는 엄격하게 보존 관리되어야 한다. 보존이 최우선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지만, 공개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를 들어 지나치게 공개하지 않는 일부 소장가들의 인식은 변해야 할 대목이다”고 설명했다.

한편, 고재식 한국미술품감정센터 대표는 “서화 가운데 말아 보관하는 족자(簇子) 형태의 작품은 아무리 조심스럽게 다룬다고 해도 펴고 말 때 손상을 피하기 어렵다. 장시간 또는 빈번한 광선 노출 등은 먹과 채색의 볕바램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2014년 8월∼12월 리움 ‘교감’ 전에 전시된 ‘인왕제색도’와 ‘금강전도’는 국보로서의 가치 보존과 지속적인 향유를 위해서는 일정한 휴식 기간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또한 “감상과 연구라는 측면에서, 해상도가 높은 영인본 제작 배포와 해상도 높은 사진의 공개 등을 고려해볼만 하다”고 덧붙였다.

'국보 제 216호 정선필 인왕제색도(鄭敾筆 仁王霽色圖)'.(사진=문화재청)
'국보 제 216호 정선필 인왕제색도(鄭敾筆 仁王霽色圖)'.(사진=문화재청)

※ 국보 제 216호 정선필 인왕제색도(鄭敾筆 仁王霽色圖)

조선 후기 화가인 겸재 정선(1676∼1759)이 비온 뒤의 인왕산 모습을 76세에 그린 그림으로 크기는 가로 138.2cm, 세로 79.2cm이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소유로 1984년 8월 6일 국가지정문화재 국보로 지정됐다. 현재는 삼성미술관 리움이 관리하고 있다.

특징 있게 생긴 인왕산의 바위를 원경으로 배치한 작품은 그 아래에 안개와 수목을 그려 넣어 단순하면서도 대담한 구도를 이룬다. 그리고 수목과 가옥이 있는 전경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인 부감법(俯瞰法)으로 포착했다.

또한 원경은 멀리서 위로 쳐다보는 고원법(高遠法)으로 나타내 마치 바로 앞에서 인왕산을 바라보는 듯 한 현장감을 준다.

안개와 산 능선은 엷게, 바위와 수목은 짙게 처리했다. 먹색의 강렬한 흑백 대비로 굴곡진 산의 습곡을 효과적으로 나타내며, 화면에 변화와 활력을 불어넣었다.

바위의 거대한 양감(量感)을 강조하기 위해 구사된 적묵(積墨)의 힘찬 붓질과, 크고 작은 수목들에 가해진 편필(偏筆)의 활달한 운필, 그리고 산등성이의 성근 피마준(皮麻皴, 산수화 준법의 일종), 짧게 끊어 찍은 작은 미점(米點) 등은 정선이 서울 근교의 실경들을 사생하면서 사용했던 기법이다. 이 그림에서는 보다 능란하고 완숙된 필치를 보여 준다.

겸재의 금강전도류에 대해 최순우 선생은 "쾌적한 부감법과 무변대한 금강 전경을 한 폭의 그림 속에 압축해 넣는 원숙한 구성의 솜씨는 그 준법의 생신한 매력과 더불어 정선다운 독보적인 경지였다"고 평했다.

'국보 제217호 정선필 금강전도(鄭敾筆 金剛全圖)'.(사진=문화재청)
'국보 제217호 정선필 금강전도(鄭敾筆 金剛全圖)'.(사진=문화재청)

※국보 제217호 정선필 금강전도(鄭敾筆 金剛全圖)

조선 후기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강산을 실제로 보고 그리는 실경산수화풍을 연 겸재가 영조 10년(1734)에 내금감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내금강의 실경을 수묵담채로 그렸으며 크기는 가로 94.5cm, 세로 130.8cm이다. 1984년 8월 6일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됐으며, 현재는 삼성미술관 리움이 관리를 하고 있다.

금강전도는 전체적으로 원형구도를 이루고 있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본 모습이다. 눈 덮인 봉우리들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 긋는 수직준법을 이용하여 거칠고 날카로운 모습으로 표현하였고, 이와 함께 위쪽에는 비로봉이 우뚝 솟아 있으며, 화면 중심으로는 만폭동 계곡이 위에서 아래로 가로지르고 있다.

바위로 이루어진 메마른 느낌의 봉우리들과는 대조적으로 왼편에는 무성한 숲을 이룬 부드러운 토산이 놓여 있는데, 이는 붓을 옆으로 눕혀 점을 찍는 방식으로 나타냈다. 화면의 윗부분에는 그림의 제목과 함께 작가의 호, 그림에 대한 감상 등이 적혀 있다.

간송미술관(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의 최완수 선생은 이 작품을 정선이 77세 되던 해인 1752년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당시의 산수화는 주로 중국 산수화를 보고 그린 것인데 반해 이 그림은 직접 우리나라의 실경을 보고 그린 것으로 정선이 그린 금강산그림 가운데에서도 가장 크고, 그의 진경산수화풍이 잘 드러난 걸작이라 할 수 있다.

정선의 ‘인왕제색도’는 어려서부터 평생의 벗이었던 사천 이병연(槎川 李病淵, 1671∼1751)이 세상을 떠나던 그 달 하순에 그린 작품이다.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과 함께 아들 정만수(鄭萬遂, 1710∼1795)와 손자 손암 정황(巽庵 鄭榥,1735∼1800)에게 전해지다가 1802년(임술) 이전 만포 심환지(晩圃 沈煥之, 1730∼1802)로 소유가 바뀌었다.

심환지가 1802년 여름 하순에 쓴 제화시가 남아있으며, 우현 고유섭(又玄 高裕燮, 1905∼1944) 선생이 쓴 ‘겸재정선소고’(‘문장’ 2권 7호, 1940)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후 충남 당진에 살던 심환지의 후손이 소장할 때도 함께 붙어 있던 이 발문은 일제강점기 최원식(崔瑗植), 진호섭(秦豪燮) 등을 거쳐 호암미술관에서 소장되던 어떤 시기에 분리된 것으로 보인다.

고재식 한국미술품감정센터 대표는 “‘인왕제색도’는 먹의 농담과 힘찬 붓질의 강한 대비를 통해 비온 뒤 바위의 무게감, 산 밑에서 피어오르는 안개와 구름, 물기 오른 나무 등 일기의 변화를 잘 표현하고 있으며, ‘금강전도’는 간송미술관 소장의 1741년 작 ‘풍악내산촐람도’와 1748년경작 ‘금강전도’, 고려대학교 소장의 ‘금강산도’와 비교할 때 묘사에 충실한 다른 작품과 달리 담박한 묵법, 고도의 음양대비, 추상화된 필치, 크기 등에서 정선이 그린 금강산도의 압권이라 할 만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병연이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고, 물이 불어 가지 못하자 비구름이 개듯 벗이 병상에서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렸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어, 그 의미가 더 깊다”라고 평가했다.

겸재 정선은 '조선시대 화성(畵聖)'으로, 단원 김홍도는 '조선의 화선(畵仙)'으로 지칭된다. 이들은 자타가 인정하듯 우리나라 회화 흐름의 긴 여정에서 큰 획을 그은 족적이 두드러진 거장이다.

지역적 편협과 고루성을 탈피하고 예술적 성취를 이룩한 이들의 그림 세계는 한자문화권에서 우리 그림의 특징과 위상을 대변하는 자존심 그 자체이기도 했다.

정선은 한때 도화서 소속 화원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으나 서울 명문 사대부 가문에서 태어나 84세까지 장수했다. 그림 소재뿐 아니라 표현기법에서도 남들과 구별되는 개성 강한 자기만의 세계를 완성했다.

그는 중국 산수화에 있어 오랜 숙제였던 선묘 위주의 화북산수와 선염 위주의 강남산수를 절충 조화해 독자적인 화풍을 전개했다. 특히 정선은 우리 산천을 그린 진경산수화에서 토산과 암산에 이 둘의 절묘한 조화를 통해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성공적으로 묘사한 조선 산수화의 완성자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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