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도균의 그림 이야기] 예술가 探究記 4 (이애리 작가)
[권도균의 그림 이야기] 예술가 探究記 4 (이애리 작가)
  • 권도균
  • 승인 2018.01.16 11: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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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아트스페이스 H] '씨앗과 열매에서 자연을 탐구하는 화가 이애리의 꽈리 이야기'

​어릴적 어머니께서는 꽈리가 붉은색을 한껏 뽐내며 피어날 때가 되면, 으레 마당에서 꽈리를 따셨다. 씨앗을 제거하고 입에 넣고, 씹어서 소리를 내보라고 하셨다.

이애리, '꽈리'.
이애리, '꽈리'.

소리가 잘나지 않자, 어머니께서 직접 꽈리를 입에 넣고 꽉꽉 소리를 내셨다. 이것이 꽈리 피리라고 하셨다. 장난감이 별로 없던 어머니 어릴 적, 외할머니께서 꽈리 피리 부는 법을 가르쳐주셨단다. 

​2017년 12월 하순의 어느 날이었다. 갤러리 연례행사인 연말 행복 나눔 자선 전시를 위해서, 작가들이 미리 맡겨놓은 작품들을 수장고에서 하나씩 전시장으로 꺼내고 있었다. 수장고 구석에서 낯설게 느껴지는 자그마한 작품 하나가 눈에 띈다. 포장지에는 이애리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이애리가 누굴까?

​2017년 8월 무더웠던 여름 어느 날, 인사동에 있는 갤러리로 붉은색 꽈리를 그리는 이애리 작가 전시를 보러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동명이인일까? 애리라는 이름이 예쁘긴 하지만, 아주 흔한 이름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포장지를 뜯었다. 먹으로 그린 검은색 꽈리 형상이 눈에 들어왔다. 재료만 다를 뿐이지, 형태는 비슷했다. 이 작품이 왜 여기 있는 것일까?

​마침 이애리 작가와는 페이스북 친구라서,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저편에서 약간의 비음이 섞인 애교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대표님, 저 기억 안 나세요? 북촌 갤러리 시절 전시회 오프닝에서 잠깐 뵈었었는데. 그 후에도 또 한번 뵈었는데요.

​도무지 기억이 잘 안 나는데요? 대표님께서 몇 년 전 자선 전시에 소품 하나 달라고 해서 드렸는데, 전시 끝나고 제가 못 찾아갔던 것이랍니다. 조만간 갤러리로 찾아가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지난 십 년간 수많은 작가들과 미술 관계자들을 만났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잠깐의 인사로 만난 사람들을 다 기억해내지 못해서 난처해질 때가 종종 있다.

​글을 쓰고 있는데, 이애리 작가가 왔다. 탤런트 같은 예쁜 외모에 미소를 잃지 않는 표정이 상대방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페이스북에서 얼굴이 익은 탓에 평소에 자주 만난 사람 같았다. 작가님, 왜 꽈리를 그리세요? 작가는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한다.

2000년 전후에는 먹과 석채로 도시 풍경을 그렸었답니다. 도시의 외로움을 표현하기 위해서, 밤 풍경의 쓸쓸한 도시 풍경을 주로 그렸지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인공적인 도시보다는 자연을 그리기 시작했답니다.

이애리, '꽈리'.
이애리, '꽈리'.

인간이 창조한 도시가 주는 쓸쓸한 외로움보다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포용하는 자연이 주는 자연 그대로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자연의 숲이나 나무를 그리다가, 어느새 나무나 꽃의 시작인 열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답니다.

작가는 숲에서, 숲을 이루는 나무로, 나무에 달린 열매로, 열매 속 씨앗으로 사유의 포커스를 점점 작은 것으로 옮겨간 듯하다. 더 나아가 씨앗, 열매, 꽃 다시 씨앗으로 매년 반복되는 순환론적 동양 사상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몇 년 전 집 근처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답니다. 할머니가 좌판에 한 아름 펼쳐 놓은 고운 빛깔의 꽈리를 이때 처음 보게 되었지요. 대표님, 꽈리 아세요? 당연하죠. 그때까지 저는 꽈리를 몰랐답니다. 그 할머니에게 꽈리 한 보따리를 사서, 작업실에 펼쳐 놓았지요. 시간이 갈수록 꽈리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되었답니다.

​이때부터 꽈리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먹으로 그리다가, 꽈리의 색을 잘 표현해보고 싶어서 붉은색 먹인 주묵을 사용하기 시작했답니다. 꽈리를 그릴 때, 가느다란 세필 붓을 사용하십니까? 아뇨. 나무젓가락 끝부분을 칼로 깎아서, 주묵을 찍어서 가느다란 선을 그린답니다. 다양한 도구를 사용해보았는데, 싸구려 나무젓가락이 가장 적합하더라고요.

​꽈리의 형상을 이루고 있는 둥근 원은 우주의 무한한 세계를 상징하고, 원을 이루는 가느다란 선들은 우주나 자연의 질서를 표현한 것입니다. 꽈리는 넓은 의미로 우주와 자연을 표현한 것이고, 좁은 의미로 사랑과 생명의 시원을 상징하는 것이랍니다. 꽈리를 통해서 놀라운 생명의 신비로움을 발견한 것 같다.

​작가와 함께 점심을 먹고, 커피와 캐머마일 티를 마시면서 나눈 대화는 끝날 줄 몰랐다. 어느새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다음에 다시 만나자고 했다.

작품이 너무 매력적인데, 올해 화랑미술제에 참여하면 어떨까요? 3월에 동양화과 대학원 진학을 앞둔 큐레이터도 작품이 좋으니, 참여했으면 좋겠다고 나를 지지한다.

전통적인 한국화의 특징은 서양화와 달리, 작가의 숨겨진 의도를 애써 찾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서양화는 때로 사회적 정치적 현실을 반영하기도 하고, 죽음도 표현하기도 하지만, 한국화는 기본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한국화 감상은 그냥 보이는 그대로, 느끼는 그대로 작품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불교 경전에 근거해서 그려낸 불화를 제외하고, 메시지를 억지로 읽어낼 필요가 없다.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을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

글을 쓰면서, 예술은 왜 시작된 것일까를 생각해보았다. 예술도 인간의 소유욕에 근원했을 것이다. 자연을 곁에 두고 싶어서 자연을 모방해서 그리기 시작했고, 시간의 흐름을 멈추고 싶어서 화폭에 가두어버린 것이다.​

이애리 작가는 꽈리가 시들어가는 것을 안쓰럽게 생각했을 것이다. 맑고 투명한 붉은빛을 내는 꽈리로 가득한 작가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그림 속에 빠져들게 된다. 유화의 붉은색이 인공적인 냄새가 난다면, 주묵에서 나오는 은은한 붉은빛은 여인의 앵둣빛 입술이 연상된다.

주묵의 붉은색의 색감이 부드러운 느낌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앞으로 본격적으로 꽈리만을 그리겠다고 한다. 얼마나 다양한 꽈리의 형상이 표출될지 사뭇 기대가 된다.​

2016년 전시 도록에서 보이는 꽈리 작품들은 먹으로 그려진 검은색 꽈리와 주묵으로 그려진 붉은색 꽈리가 무질서하게 섞여있었다. 하지만 2017년 작품들에서는 동양화의 여백의 미를 살려 만들어진 흰색 꽈리와 붉은색 꽈리가 조화롭게 어우러져서 안정감을 더해준다. 꽈리의 형상도 점점 세련되어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한국화 작품이 주는 가치는 마음의 평온함을 유지시켜주는데 있다. 아울러 우리의 감성을 풍부하게 해주고, 착한 마음씨를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어린 왕자 소설에 나오는 한 구절처럼, 오직 마음으로만 올바르게 볼 수 있고, 진정으로 중요한 건 눈에는 안 보이는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눈에 보이는 것 이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소중한 것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 같다. 예술가의 눈에 비친 세상은 우리들이 무심코 지나쳐 버리는 꽈리 같은 사소한 것에서 발견된 자연의 아름다운 세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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