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가 보물창고-⑧] 이건희 소유, 국보 제85호 '금동신묘명삼존불입상'
[삼성가 보물창고-⑧] 이건희 소유, 국보 제85호 '금동신묘명삼존불입상'
  • 왕진오
  • 승인 2017.11.01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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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포=왕진오 기자] 1930년경 황해도 곡산군 화촌면 봉산리에서 1400년이 넘은 불상 하나가 출토됐다는 소식이 당시 평양경찰서에 보고됐다.

당시는 불법적인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제정한 '고적 및 유물 보존규칙'과 '고적조사위원회 설치규정'이 시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보 제85호‘금동신묘명삼존불입상’.(사진=문화재청)
국보 제85호‘금동신묘명삼존불입상’.(사진=문화재청)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신고를 받은 고등계 형사 나카무타 신자부로가 발견자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400원을 주고 가져갔다고 한다. 이 돈은 당시 군수 월급이 70원 정도였고, 경찰직인 형사의 월급은 20원 안팎이었던 상황에서 엄청난 비용을 지불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6. 25를 겪으면서 금속유물 감식 전문가였던 김동현이 부산으로 피난 가며 가지고 갔다. 이후 어려운 생활고에도 팔지 않고 소장하고 있었다. 불상의 가치를 인정한 문화재관리국은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85호로 지정했다.

김동현은 이 불상을 약 45년간이나 간직하다가 80세가 넘어 더 이상 소장할 수가 없자, ‘고구려금동반가사유상’과 함께 1992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에게 양도했다. 1995년 문화재관리국에 소장자의 명의로 제출한 신고서에는 10억 원이란 거래 가격이 기재됐다.

국보 제85호 금동신묘명삼존불입상은 서기 571년에 주조된 높이 15.5센티미터의 고구려 불상으로 앙련(仰蓮)을 딛고 선 석가여래의 뒤에 배 모양의 광배가 붙고, 광배 양쪽에 협시불이 조각된 희귀한 불상으로 광배의 뒷면에는 8행(行)의 명문이 새겨져 있어, 이 불상의 조성 경위와 연대를 확인할 수 있다. 명문은 ‘다섯 명의 도반이 스승과 부모를 위해 아미타불을 조성한다’는 내용이다.

중국 불상으로 취급받다 국보급 유물로 인정

황해도에서 발견된 이 불상의 최초 소유자인 나카무라 신자부로는 골동상에게 감정을 의뢰했지만, 좀처럼 볼 수 없는 형태 때문에 조선의 불상으로 보기 어렵다는 말을 듣게 된다. 당시 중국의 불상이라는 감정이 내려지면 너무 흔한 유물로 취급되어 일본에서 판매 할 수 없었다.
시간은 흘러 '금동신묘명삼존불입상(金銅辛卯銘三尊佛立像)'은 서울 명동에서 대형 골동상을 운영하던 일본인 거물 골동상에게 800원에 팔린다.

골동상들에게 조차 중국 불상으로 취급받던 불상은 동경제국대학 공학부를 졸업한 건축사학자인 세키노 다다스에 의해 "대단한 불상이다. 국보급으로 취급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라는 평에 의해 다시금 눈길을 모으게 됐다.

세끼노 다다스(關野貞, 1867∼1935)의 평이 중요한 이유는 동경제국대학의 조교수로 재직하며 1902년부터 한국과 중국 각지의 고적을 답사했고, 1918년에는 당(唐)의 불교 유적인 천룡산 석굴을 발견하고 나아가 평양의 낙랑 유적을 밝히기도 한 유명한 학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한국에 공식적으로 들어온 것은 1902년경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대한제국은 일본의 강권에 못 이겨 이 땅의 옛 건물과 고적에 대한 실태를 조사했고, 그 조사자로 그가 발탁됐다. 하지만 이 조사는 일본이 조선을 집어삼키기 위한 정보 수집의 일환이었음을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한국을 대신한 조사라 그는 돈과 행동에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주요 고적지와 옛 건물, 그리고 폐사지 까지 조사해, 1904년에 '한국 건축 조사보고'를 발표했다.

불상의 가치 알려지자 천정부지로 가격 올라

세끼노는 이 불상을 ‘조선 미술사(朝鮮美術史)’와 기타 저서에 사진과 함께 실으면서, 출토 경위와 가치에 대해 자세히 소개했으며, 이 때 모든 골동상이 주목했다. 가격은 금세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10∼15만 원까지 호가했다. 불상의 가치가 알려지자 천정부지로 가격이 뛴 것이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우리나라 제일의 고미술품 수집가로 등장한 이가 있었다. 부동산으로 돈을 번 장석구란 인물이다. 그는 일본인들이 쫓겨 가면서 귀국할 때 헐값으로 판 골동품을 줍다 시피 모아 들였다. 이중 이토가 수집한 한국 골동품의 대부분이 넘어오게 됐다.

국보 제85호‘금동신묘명삼존불입상’.(사진=문화재청)
국보 제85호‘금동신묘명삼존불입상’.(사진=문화재청)

평양에서 서울로 내려온 김동현은 장석구에게 이 불상을 “2만 5천 원만 내시오”라며 양도하라고 주문했다. 장석구는 이 불상의 가치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토 마끼오가 소장했을 때는 15만 원, 아니 기와 집 100 채 값에 해당하는 천하의 보물이었다. 그 가치를 모르는 장석구에게 무턱대고 값을 높여 부른 것이다.

세상 물건에는 모두 임자가 따로 있는 법이다. 6. 25를 겪으면서 김동현은 이 불상을 부산으로 피난 가며 가지고 갔다. 그리고는 어려운 생활을 겪으면서도 팔지 않고 늙을 때까지 가지고 있었다. 세월은 흘러 불상의 가치를 인정한 문화재관리국은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85호로 지정했다.

김동현은 이 불상을 약 45년간이나 소장하다가 80세가 넘어 더 이상 소장할 수가 없자, ‘고구려금동반가사유상’과 함께 1992년 이건희에게 양도했다.

국보 제85호‘금동신묘명삼존불입상(金銅辛卯銘三尊佛立像)’

국보 제85호 ‘금동신묘명삼존불입상’은 하나의 커다란 광배(光背)에 본존불과 좌우보살상을 조각한 형태의 삼존불(三尊佛)로 현존하는 같은 형식의 불상 중에서 가장 크다.

좌우의 보살상은 본존불보다 훨씬 작게 만들어 광배의 끝에 겨우 매달린 듯 보이는데, 이는 본존불을 한결 돋보이게 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 본존불의 가슴과 광배의 오른쪽 끝에 약간의 흠집이 있을 뿐,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본존불은 얼굴이 풍만하고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으며,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두껍게 표현되어 있으며, 옷자락은 양 옆으로 펼쳐지면서 발목까지 덮고 있다.

오른손은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은 내려서 손끝이 아래로 향하면서 손바닥을 보이고 있다. 광배는 불상과 분리되며 본존불의 등 뒤에 달려있는 뾰족한 촉(觸)으로 고정되어 있다.

배(舟) 모양의 광배는 본존불을 중심으로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표현했고, 그 안에 연꽃무늬, 덩굴무늬, 인동초무늬를 새겼다. 머리광배와 몸광배의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새기고, 그 사이에는 작은 부처를 조각했다.

국보 제85호‘금동신묘명삼존불입상’.(사진=문화재청)
국보 제85호‘금동신묘명삼존불입상’.(사진=문화재청)

광배의 아래쪽 끝부분에 새겨진 두 협시보살은 큼직한 얼굴에 원통형의 빈약한 체구를 지니고 있다. 가슴에는 X자형의 옷자락이 새겨져 있으며, 전체적으로 본존불에 비해 솜씨가 서툴러 보인다.

광배 뒷면에는 다섯 사람이 모여 그들의 스승과 부모를 위해 이 불상을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다. 글에 나타난 사람 이름이나 불상의 양식으로 보아 고구려 불상으로 보이며, 글에 나타난 ‘신묘(辛卯)’는 고구려 평원왕 13년(571)년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인 불상 형태는 큼직한 얼굴과 손, 추상적인 신체 표현 등에서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국보 제119호)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지만, 강인한 기품이 줄어들고 유연하면서 세련된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아트인포=왕진오 기자 wangp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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