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6, MMCA 레디메이드와 아방가르드 아티스트 마르셀 뒤샹 展
D-26, MMCA 레디메이드와 아방가르드 아티스트 마르셀 뒤샹 展
  • 이예진 기자
  • 승인 2019.03.13 16: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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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포=이예진 기자] "예술가들이 사용하는 튜브 물감은 제조된 생산물이자 이미 완성된 물건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그림들은 '도움을 받은 레디 메이드'이자 아상블라주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전시된 마르셀 뒤샹의 '샘'.(사진=아트인포DB)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전시된 마르셀 뒤샹의 '샘'.(사진=아트인포DB)

1887년 7월 28일 오후 2시, 앙리 로베르 마르셀 뒤샹 (Henri Robert Marcel Duchamp)은 프랑스 루앙 근처, 마을 블랭빌 크레봉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쥐스탱 이시도르 뒤샹은 공증인, 어머니는 마리 카로린 뤼시이다.

가스통(Gaston),레이몽(Raymon) 두 형이 있고, 마르셀은 셋째였다. 맏형인 가스통은 장차 자크 비용(Jacques Villon)이라는 예명을 사용하게 된다.

둘째 형 레이몽은 훗날 뒤샹 비용(Duchamp Villon)이라는 이름으로 조각가가 되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중 사망한다. 마르셀 아래로는 세 명의  여동생 쉬잔, 이본, 막들렌이 있다.

소묘가이자 화가이며 판화가였던 마르셀의 친할어버지 에밀 니콜(Emile Nicolle) 루아의 해상 중개인이던 할아버지는 회화에 여생을 바치기 위해 1874년에 직장을 그만두었다. 할아버지는 집안 전체에 예술의 기운을 스며들게 해주셨으며, 자신의 그림과 판화작품들을 집안 곳곳에 진열하는 것을 즐기셨다. 이런 환경은 가족이 격세유전으로 같은 활동에 관심을 가지게 만든 셈이다.

1902년 여름 청소년 시절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던 어린 뒤샹의 작품들이 소개된다. 당시 프랑스에서 일어나고 있던 혁신적인 미술 양식들 사이를 오가며 8년 동안 작품을 생산했고, 파리의 입체파 그룹과 독창적인 교류를 했다. 

'계단을 내려오는 마르셀 뒤샹'.(사진=이예진 기자)
'계단을 내려오는 마르셀 뒤샹'.(사진=이예진 기자)

이때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 2’를 포함한 많은 핵심 작품들이 생산된다. 이 그림은 아모리 쇼에 전시되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13년 미국 관객에게 현대미술을 각인시킨 이 기념비적인 전시로, 뒤샹은 이미 뉴욕에서 유명인사가 됐다. 

뒤샹이 회화 기법과 화가라는 직업을 포기하고, 예술가로서 작업하는 새로운 방식을 창안했던 1912년 가을 이후의 시기를 조명한다. 작가는 기념비적인 구조물 ‘그녀의 독신남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큰 유리)의 개념을 그리기 시작했다. 

1913년에는 ‘자전거 바퀴’를 만들었는데, 이는 평범한 기성품으로 만든 예술품, 즉 레디메이드의 첫 번째 작품에 해당한다. 

레디메이드는 그 무렵 뒤샹이 자신의 노트에 쓴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예술적’이지 않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1915년 여름, 뒤샹은 전쟁에 휩싸인 파리를 떠나 뉴욕으로 향했고, 수집가 루이스와 월터 아렌스버그 부부 주변에 모인 재능 있는 예술가, 작가, 지식인 무리에 합류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마르셀 뒤샹전 설명회 모습'.(사진=이예진 기자)
'국립현대미술관 마르셀 뒤샹전 설명회 모습'.(사진=이예진 기자)

아렌스버그 부부는 이후 뒤샹의 주요한 후원자가 되었다. 1917년, 뒤샹이 ‘샘’이라는 제목을 붙인 논쟁적인 오브제가 전시회에 출품되면서 레디메이드라는 개념과 그것의 의미에 대한 대중적 논의가 촉발했다. 뒤샹은 1967년 삐에르 까반느와 “나에게는 항상 나를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었다”고 회상한 것으로 알려졌다.

1920년대와 1930년대 뒤샹이 파리로 다시 돌아와 작업하던 시기를 살펴본다. 이때 뒤샹은 미술에서 체스로 직업을 바꾸겠다는 생각을 했고, 이후 근 20년간 직업정신을 갖고 체스 활동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동시에 에로즈 셀라비라는 여성 자아를 만들어 새로운 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회전하는 광학기계로 아이디어를 표현하면서, 그 영역이 미술에서 공학 및 기구 쪽으로 한층 더 옮겨가기도 했다. 

또한, 작품의 미니어처 복제판을 담은 이동식 미술관을 선보여 예술에 대한 급진적 문제 제기를 이어나갔다. 그가 만든 이동식 미술관은 ‘여행가방 속 상자’라는 제목으로 1941년 여름 이번에는 2차 세계대전을 피해 파리를 떠나 다시 뉴욕으로 갔을 때 뒤샹의 망명자 처지를 상징하게 됐다. 

'마르셀 뒤샹전 설치 작품 모습'.(사진=이예진 기자)
'마르셀 뒤샹전 설치 작품 모습'.(사진=이예진 기자)

“에로즈 셀라비는 1920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유태인 이름일까? 성전환을 한 것이다. 내 개인적 취향에는 로즈는 가장 ‘추한(醜漢)’이고 셀라비는 ‘세라비(C’est la vie, 그것은 인생)’의 단순 말장난이다.” - 마르셀 뒤샹, 장 크로티와 쉬잔 뒤샹에게 보낸 1920년 10월 20일 자 편지 중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아방가르드 예술의 원로로 널리 알려져 세계 곳곳을 다니며 작품을 선보이던 시기를 보여준다. 여러 미술관의 그의 작품을 소장했고, 특히 필라델피아 미술관은 1950년 루이즈와 월터 아렌스버그 부부가 기증한 현대 미술 컬렉션의 일부로 뒤샹의 전작 중 다수를 입수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뒤샹이 기본적으로는 은퇴한 상태이며 그의 예술에 대한 이야기도 끝났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런 유명한 예술가로서 공인의 이미지가 널리 퍼지는 동안 뒤샹은 20년에 걸쳐 아무도 모르게 최후의 예술적 선언에 힘을 쏟았다.

1968년 그가 사망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의 방 만한 크기의 디오라마 작품 ‘에탕 도네’가 공개되자, 그가 말년에 남긴 작업의 통일성이 확연해졌다. 

'뒤샹의 여행용 가방 전시 모습'.(사진=이예진 기자)
'뒤샹의 여행용 가방 전시 모습'.(사진=이예진 기자)

“예술가가 뭔가를 하면 그것은 언젠가 대중이나 관객이 개입하면서 알려지게 되지. 그 뒤에는 후세에 전해지고. 이런 사실을 지워버릴 수가 없는 까닭은 이것들이 양극에서 생산되기 때문이야. 한 극은 그것을 보는 사람이지. 내게는 작품을 만드는 사람과 보는 사람 모두 똑같이 중요하다네. 일생동안…나는 일하기를 원했을지 모르지만, 내 안 깊숙한 곳에 거대한 나태함이 자리잡고 있었지. 나는 일하는 것보다는 살고, 숨쉬는 것을 휠씬 더 좋아했어. 내가 한 작업이 장차 사회적 관점에서 어떤 중요성을 가질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지. 그러니까 말하자면 나의 예술은 살아가는 것이었어. 매순간, 매번 숨 쉬는 것은 그 어디에도 써 있지 않고, 시각적인 것도 정신적인 것도 아닌 작품인셈이지. 그것이 일종의 변하지 않는 행복이야.”

1968년 10월 2일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한 후, 혈전으로 급사해 사망하게 된다. 뒤샹은 이 시대의 가장 혁신적이고도 생동감 넘치는 미술운동의 탄생과 흐름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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