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기자의 화랑가 돋보기] 이호재 회장 "가족 같은 그들, 국내 미술계 인기작가가 됐죠."
[왕기자의 화랑가 돋보기] 이호재 회장 "가족 같은 그들, 국내 미술계 인기작가가 됐죠."
  • 왕진오
  • 승인 2017.12.20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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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포=왕진오 기자] 30년 전, 서울 인사동의 한 건물 2층 작은 공간에서 출발한 가나아트가 개관 30주년을 맞았다. 26세에 친구 따라 고려화랑에서 일하던 이호재 회장이 처음부터 한다는 의미로 '가나'라는 이름의 화랑 간판을 내놓으며 국내 화랑계의 첫 걸음을 띤 것이다.

'이호재 가나아트 회장'.(사진=왕진오 기자)
'이호재 가나아트 회장'.(사진=왕진오 기자)

"나는 아웃사이더는 아니지만 아직 소개 안 된 작가들 위주로 전시를 하다 보니 훌륭한 분들을 많이 만난 것이 가장 큰 보람입니다."라며 국내 최대 화랑으로 600회 이상의 전시를 기획하는 것을 비롯해, 국내 미술계의 성장과 저변확대를 위해 힘써온 그간의 시간에 이 회장과 작가들 간의 잊지 못할 인연들을 빼놓을 수 없다.

"가나 화랑은 1985년 세계 3대 미술품 견본시장 중 하나인 프랑스 파리에서 매년 열리는 피악(FIAC)을 관람하다 알게 됐다. 당시 한국 화랑으로는 가나가 유일하게 참여했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다가 가나화랑을 떠올렸다. 궁핍한 내 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 이 회장과 통화를 하고 1톤 트럭에 그림을 가득 싣고 화랑을 찾아갔다. 이 회장이 그림을 사지 않았다면 인사동 골목에 모두 버리고 올 생각이었는데 호당 2만원에 사줬다. 그리고 매달 50만원의 지원금을 받고 가나의 전속 작가가 됐다. 가나아트는 나에게 '중매쟁이'다. 그때 인연이 없었으면 그림을 포기했을 것이다."

가나아트의 얼굴 작가로 알려진 사석원 작가와의 인연이다. 국내 화랑으로는 처음으로 전속작가 제도를 도입해 작가들이 안정적인 작업환경에서 작품을 완성시켰던 가나아트와 30여년을 함께해온 이들이 옛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가나아트가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었다."며 고마워했다.

전병헌 작가와의 인연도 특별하다. 당시 종로경찰서 대공수사과에 근무하던 이인수 형사로부터 어느 날 우연히 이호재 회장을 소개받은 이후, 프랑스로 건너가고 싶다는 이야기에 흔쾌히 경비를 지원하겠다는 말을 듣게 됐다는 것이다. 당시 한국에서 화랑이 젊은 작가를 아무 조건 없이 지원한 최초의 일로 지금까지 미술계에서 회자되고 있는 일화이다.

이호재 회장은 삽 십년 전, 작가들의 애틋하면서도 특별했던 기억을 잊지 않고 아직도 첫 만남의 설렘으로 흥분된다고 말한다.

1984년 전속작가제도를 도입한 이후 2002년 평창동, 2006년 경기도 장흥에 아틀리에를 조성해 작가들에게 창작 공간을 제공했다. 지금까지 가나와 한솥밥을 먹은 작가는 고영훈, 박은선, 배병우, 석철주, 원성원, 도성욱, 한진섭, 임옥상 등 100여명이다. 지금도 작업실에는 60여명이 머물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스물여섯 살인 1978년 미술계에 뛰어든 이 회장은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지금의 염기설 예원화랑 대표와 고려화랑에서 일했다. 3개월 동안 그림 한 점 못 팔다가 그해 12월 24일 처음으로 비즈니스를 했다. 그림을 판 것"이라며 "그 때 인연으로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 밝혔다.

이 회장은 1985년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던 고암 이응노(1904-1989)화백을 찾았을 당시가 아직도 생생하다고 전한다. 당시 동백림 사건으로 고초를 겪고 있던 이응노는 이 회장에게 "한국에서 내 작품을 없애기 위해 온 공작원이냐"고 물었다.

'가나아트 30주년 기념전 컨템포러리 에이지(CONTEMPORARY AGE)'전시 모습.(사진=왕진오 기자)
'가나아트 30주년 기념전 컨템포러리 에이지(CONTEMPORARY AGE)'전시 모습.(사진=왕진오 기자)

이 회장은 설득 끝에 고암의 작품 '인물군상'을 받아 1989년 국내 전시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전시 이후 경찰 조사 까지 받았다.

이 회장이 화랑 이름을 '가나'라고 정한 이유는 가나다순으로 화랑들을 표기할 때 가장 앞에 나오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국내 화랑들 중에서 가장 먼저 화랑을 기업형으로 변화시켜 오늘의 가나를 만들었다.

재벌가와의 거래를 통해 화랑계의 큰손으로 미술계를 좌지우지 했고, 화랑이 미술품 경매회사까지 설립해 운영하는 것을 두고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었다. 하지만 30년 동안의 행보는 여느 화랑이 걷지 못했던 커다란 족적을 남긴 점은 확실하다.

이 회장은 2000년 1월1일 자로 가나아트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9남매 중 막내 동생인 이옥경 대표가 화랑을 운영을 하다 장남 이정용 대표가 화랑을 이끌고 있다.

그래도 침체기인 국내 미술시장을 걱정한다. 이 회장은 “국내 컬렉터가 외국 작품 위주로 관심을 보이고 있어 안타깝다”며 “미술에 대해 사회적으로 책임질 부분이 있어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젊은 작가 몇은 국내보다 외국에서 더 주목받고 있다. 그런 점에서 잘만하면 좋은 시장을 만들어 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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