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영 교수의 언어로 읽는 세상] '나의 돼지코를 사랑하게 된다면'
[신지영 교수의 언어로 읽는 세상] '나의 돼지코를 사랑하게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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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12.21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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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신지영(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부유한 귀족 가문에 딸이 태어났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 가문에는 저주가 하나 있었다. 딸이 태어나면 돼지코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영화 '페닐로피' 포스터.
영화 '페닐로피' 포스터.

다행히 저주를 받은 후 그 가문에는 5대째 계속 아들만 태어났다. 그런데 저주 이후 처음으로 그 가문에 딸이 태어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아이는 돼지코를 가지고 태어났다.

저주를 풀 수 있는 길은 한 가지였다. 그녀와 같은 종류의 사람이 그녀를 사랑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는 그 아이를 대저택 속에서 외부인과의 접촉을 차단한 채 25년을 키운 후, 그녀를 사랑해 줄 귀족 집안의 자제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부유한 귀족 가문의 사위가 될 욕심으로 많은 남자들이 자원을 했지만 돼지코를 보고는 모두 도망을 가 버렸다.

그러던 어느날 그 가문의 비밀을 파헤칠 욕심을 가진 기자가 몰락한 귀족 가문의 한 남자를 고용해서 사윗감 후보가 되게 한 후, 그녀에게 접근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둘은 그만 사랑에 빠지게 됐다.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한 그 남자는 자신이 돼지코의 저주를 풀어주지 못할 것을 알고는 말없이 그녀를 떠나 버렸다. 사실 그 남자는 귀족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돼지코 때문에 떠났다고 생각한 그녀는 집을 떠나 세상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점점 자신의 돼지코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날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돼지코가 참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순간 놀랍게도 저주는 풀렸고 더 이상 그녀의 코는 돼지코가 아니었다. 그녀와 ‘같은 종류의 사람’이란 바로 ‘그녀 자신’을 의미한 것이다.

이상은 ‘페넬로피’라는 영화의 줄거리다. 동화 같은 이야기지만 사실 이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성장 스토리라고도 할 수 있다. 페넬로피만이 아니라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돼지코를 하나씩은 가지고 성장한다. 우리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저주받은 돼지코를 가리고 숨기기도 하고 원망하고 부인하기도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돼지코의 저주를 푸는 방법은 바로 자신이 자신의 돼지코를 사랑하는 것이다.

물론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기란 쉽지 않다. 자기의 못나고 지질한 점들을 너무나 많이 알고 있으니 자기를 사랑하는 일이 어떻게 쉬울 수 있겠는가? 게다가 다른 사람이 보는 것보다 자신의 돼지코는 자기에게 유독 더 못나고 못생기고 커 보인다. 반면에 남의 돼지코는 우리에게 잘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돼지코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엄친아 엄친딸도 모두 사실은 자신만의 돼지코를 가지고 있다.

필자도 필자의 돼지코가 있었고 페넬로피처럼 돼지코의 저주를 어느날 풀 수 있었다. 저주를 푸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자신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과 절대 비교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게 아니라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해 본다. 그리고 어제보다 아주 조금만 더 나은 내가 되어 보는 것이다. 절대 조급해 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시간이 쌓이면 점점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나로 변해 가고 어느덧 나의 돼지코는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 돼지코의 저주는 이렇게 어느날 갑자기 풀리게 된다.

‘멋진 사람이 되어야지’라는 결심만으로 바로 멋진 사람이 되는 일은 결코 없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그런 줄 착각한다. 멋진 사람이 되어야지 하고 결심한 바로 다음 날, 왜 나는 아직 멋진 사람이 아닐까를 고민한다.

멋진 나를 만나는 일은 결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으로 되는 것이다. 페날로피가 자신의 돼지코를 사랑스럽다고 느끼게 된 것은 ‘내 돼지코를 사랑해야지’라는 결심 때문이 아니었다.

세상과 만나며 세상 속에서 자신이 보낸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서 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좀 더 시간을 줄 필요가 있다. 자신을 믿고 기다리는 속에서 돼지코의 저주는 어느새 스르르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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