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조각 개척자 최만린, '존재의 본질'로 생명성 부각
추상조각 개척자 최만린, '존재의 본질'로 생명성 부각
  • 왕진오
  • 승인 2018.04.29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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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포=왕진오 기자] 한국 추상조각의 개척자로 한국 현대미술사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거장 최만린(84)의 작품 세계를 재조명하는 '존재의 본질' 전이 5월 3일부터 리안갤러리 대구에서 열린다.

최만린, '태(placenta)-88-8'. 청동, 58x24x49cm, 1989.(사진=리안갤러리)
최만린, '태(placenta)-88-8'. 청동, 58x24x49cm, 1989.(사진=리안갤러리)

작가는 생명의 근원적 이미지를 원초적 원형의 유기적인 형태로 형상화해 '생명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을 펼쳐 보이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60여년에 걸친 작가의 예술 인생 중에서 197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작업한 '태(placenta)' 시리즈와 'O zero' 연작을 중심으로 한 대형 작품 위주로 전시장을 가득 채웠다.

최만린의 대표적인 두 시리즈는 작가의 다른 연작보다도 '유기적' 형태의 추상성이 두드러진 작품들로서 직관적 생명성이 가장 잘 표현된 작품으로 불리고 있다.

'2016년 성신여자대학교에서 최만린 작가'.(사진=왕진오 기자)
'2016년 성신여자대학교에서 최만린 작가'.(사진=왕진오 기자)

최만린은 서양미술사의 맥락 안에서 조각이라는 매체를 사용하면서도 1960년대부터 자신의 예술 탐구에서 '한국성' 혹은 '전통적' 정신과 가치를 어떻게 도입하고 녹여낼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왔다.

그는 서구 조각과 차별화될 수 있는 한국 고유의 독창적 조형성의 확립 방안에 대해 고심하고 실험하는 데에 일생을 바쳐 왔다고 할 수 있다.

최 작가가 조각가로서 자신의 예술적 정체성을 공고히 하기 시작한 것은 1958-65년의 시기에 선보인 '이브(Eve)'연작부터로 볼 수 있다. 이브는 기독교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이라기보다는 한국전쟁 직후 불한하고 고통스러운 전쟁의 참상을 감내하고 극복하고자 하는 시대적 표상, 즉 연민의 정서에서 본 보편적 인간의 본질적 상징체로 할 수 있다.

인체의 자세한 묘사나 직접적 형상의 재현을 배제하고 거친 표면의 표현적 양식으로 나아가면서 인체 자체의 물리적 현상을 탐구하기보다 존재의 근원적 문제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 시기이다.

최만린, '0(zero)-93-9'. 청동, 30x30x9cm, 1993.(사진=리안갤러리)
최만린, '0(zero)-93-9'. 청동, 30x30x9cm, 1993.(사진=리안갤러리)

1965-77년 선보인 '천·지·현·황(Heaven·Earth·Black·Yellow)', '일월(Sun & Moon)', '아(Grace)'등의 작품을 통해 인체와의 작별을 고하고 추상조각으로 나아가면서 태극사상이나 서예의 서체를 도입하는 등 한국의 정신문화적 뿌리와의 결합을 통해 한국미술의 정체성과 형식적 토대를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태'와 '맥(Vein)'시리즈를 발표한 1975-89년의 시기에는 우주나 자연의 섭리와 같은 총체적이고 형이상학적 차원이 아닌 인간적 차원에서 원초적인 에너지를 분출하는 생명성에 초점을 맞췄다.

최만린, '0(zero)-04-6'. 청동, 100x100x90cm, 2004.(사진=리안갤러리)
최만린, '0(zero)-04-6'. 청동, 100x100x90cm, 2004.(사진=리안갤러리)

1987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선보이는 '점(Dot)'연작과 'O'시리즈는 앞서 진행된 예술적 탐구를 모두 함축하면서 동시에 이전의 개념으로부터의 탈피를 모색한 작품들이다.

점을 ‘O’로 치환하고자 애써온 작가는 '무(無)'로서의 점을 확장해 모든 것을 아우르고 다시 근원으로 회귀하는 형태인 O로써 자신의 예술 탐구 여정이 완성기에 접어들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존재의 본질(The Essence of Existence)'전시에 선보이는 '태' 시리즈는 최만린 조각의 양식적 정점기로 그의 상징적 조형언어인 살아 움직이듯 꿈틀꿈틀 거리는 유기적 형태가 가장 잘 드러나는 시리즈 중의 하나다.

최만린, '태(placenta)-84-2'. 청동, 115x48x119cm, 2010.(사진=리안갤러리)
최만린, '태(placenta)-84-2'. 청동, 115x48x119cm, 2010.(사진=리안갤러리)

마치 생명체가 잉태되어 세포분열을 통해 변태를 거듭하는 모양의 작품은 때로는 둥근 알에서 일어나 상하 좌우로 뒤틀리듯 뻗어 나가다가 둥근 원형으로 응축되기를 반복하며 유연한 곡선을 이루는 생장을 보여 주거나 때로는 자기 복제를 하듯 대칭적 형상으로 나타난다.

한국 전통의 민간신앙, 제례의식에 관심이 많았던 작가는 심장의 박동과 같은 장구나 북의 원초적 리듬, 접신한 무당의 무아 상태의 춤사위에서 생명의 강렬한 에너지를 느꼈으며, 이는 곧 생명성이 역동적 조형성으로 실현되는 하나의 원천이 됐다.

이 역동성은 단순히 시각적 감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감각적인 시너지를 유발해 더욱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만든다.

'O'시리즈는 생명성의 본질에 더욱 천착한 결과물로서 개념적 차원으로부터의 초월적 의지를 드러낸 작품이다. 알과 같은 타원형이나 원기둥과 유사한 형태, 증식하듯 땅에서 돋아나는 새싹이나 단세포의 원생동물인 아메바를 연상시키는 형태, 그리고 O의 형태에 기반을 둔 다양한 형태로 구현된 'O'시리즈는 값이 없는 수인 제로이자, 도교의 무(無), 불교의 공(空)과 유사한 상태이다.

최만린, '0(zero)-93-8'. 청동, 450x400x100 cm,1993.(사진=리안갤러리)
최만린, '0(zero)-93-8'. 청동, 450x400x100 cm,1993.(사진=리안갤러리)

최만린 작가는 "자연과 생명의 숨결을 흙에 담아서 마음의 울림을 빚었다"라며 "모든 기존의 개념적, 이론적 틀을 배제하고 즉감적인 감각의 영역에서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작가는 무한한 생명력과 우주적 원리로서의 보편성을 가진 모든 존재의 본질을 철학적, 학문적 사유가 아닌 직관적, 본능적 감각으로 현장에서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또한 이미 각인된 복잡한 지식보다는 작품의 모양 그대로를 눈으로 가슴으로 느끼며 '생명성'의 진정한 실체가 무엇인지를 음미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원한다. 전시는 7월 7일까지.

(아트인포=왕진오 기자 wangp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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